제284편 : 이원규 시인의 '물봉선의 고백'
@. 오늘은 이원규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물봉선의 고백
이원규
내 이름은 물봉선입니다
그대가 칠선계곡의 소슬바람으로 다가오면
나는야 버선발, 버선발의 물봉선
그대가 백무동의 산안개로 내리면
나는야 속눈썹에 이슬이 맺힌 산처녀가 되고
실상사의 새벽예불 소리로 오면
졸다 깨어 합장하는 아직 어린 행자승이 됩니다.
하지만 그대가
풍문 속의 포크레인으로 다가오고
소문 속의 레미콘으로 달려오면
나는야 잽싸게 꽃씨를 퍼뜨리며
차라리 동반 자살을 꿈꾸는 독초 아닌 독초
날 건드리지 마세요
나비들이 날아와 잠시 어우르고 가듯이
휘파람이나 불며 그냥 가세요
행여 그대가
딴마음을 먹을까 봐
댐의 이름으로 올까 봐
내가 먼저
손톱 발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맹세를 합니다 첫눈을 기다립니다
내 이름은 물봉선
여전히 젖은 맨발의 물봉숭아 꽃입니다
- [옛 애인의 집] (2003년)
#. 이원규(1962년생) : 경북 문경 출신으로 1984년 [월간문학]과 1989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 중앙일보 기자를 그만두고, 지리산 밑 오두막집에 거처하면서 시를 쓰며 지리산 지킴이를 자처하며 삶.
(혹 지리산에 가시면 박남준과 이원규 두 시인을 만나보세요. 이미 지리산이 된 두 시인은 시를 쓰면서 지리산 지킴이로 생명평화운동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함께 나누기>
시를 해설하기에 앞서 시인에 대한 소개를 덧붙입니다. 지리산 품에 안겨 살아가는 이 시인에게 몇 가지 접두사가 붙습니다. 도보순례자 (10년 간 25,000리 전국 순례), 라이더 (rider - 바이크 모는 게 유일한 사치), 환경운동가 (생명평화운동에 앞장섬), 유발승(有髮僧 : 머리만 깎지 않았을 뿐 거의 스님과 다름없는 생활을 함), 대학강사 (순천대 문창과), 야생화 사진가.
시로 들어갑니다.
봉선화는 알아도 물봉선화는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일단 자라는 곳은 개울가나 습기가 많은 곳입니다. 제가 달내마을에 들어와 집 지으려 할 때 집터 뒤 작은 개울가에 지천으로 핀 꽃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던지요. 딱 제 취향에 맞는 꽃이라서 말이죠.
봉선화가 시골의 소박한 이미지와 어울린다면 물봉선화는 그보다 더 촌티 나는 꽃입니다. 이렇게 비유하지요. 전원주택이 봉선화라면, 물봉선화는 예스런 시골집으로. 아, 두 꽃 다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입니다. 시 가운데 나오는 "날 건드리지 마세요"가 꽃말을 이용한 시구입니다.
이 시 역시 조곤조곤 읽으면 쉬 이해될 겁니다. 다만 칠선계곡, 백무동, 실상사가 지리산에 있는 계곡과 절 이름이란 건 알아야겠죠. 우리나라 산과 강은 개발이란 이름 아래 파헤치고 있는데 지리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봉선화는 화자가 선택한 개발을 싫어하는 상징적 존재.
화자는 스스로 물봉선이라 합니다. 그래서 그대가 칠선계곡 소슬바람이 되어 다가오면 나는 버선발로 나가 반갑게 맞이하겠노라고. 또 그대가 백무동 산안개가 되어 내리면 나는 속눈썹에 이슬이 맺힌 산처녀가 되고 싶다 합니다. 거기에 그대가 실상사의 새벽예불 소리로 오면 나는 졸다 깨어 합장하는 아직 어린 행자승이 됩니다.
"하지만 그대가 / 풍문 속의 포크레인으로 다가오고 / 소문 속의 레미콘으로 달려오면"
이제 그대가 '포클레인', '레미콘'으로 다가오면 나는 가만있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두 시어는 개발이란 미명 아래 자연을 파괴하는 존재의 이미지. 그래서 기사 검색해 보니 (시 나올 당시) 지리산댐 건설 계획 때문에 환경 파괴와 수자원 확보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더군요. 시인은 당연히 반대단체에 속해 있습니다.
"날 건드리지 마세요"
'날 건드리지 마세요'는 봉선화 류의 꽃말이면서 시에서는 나를 건드리면 잽싸게 꽃씨를 퍼뜨려 차라리 동반 자살을 꿈꾼다고 합니다. 물봉선화는 어혈을 제거하고 부기를 가라앉히는 약성을 지니지만 바를 때는 상관없으나 섭취 시엔 구역질, 구토 및 설사 유발 독성을 지닙니다. 그 독성으로 개발론자를 어떻게 하겠다는 뜻보다는 나름의 저항을 암시하는 시행입니다.
"행여 그대가 / 딴마음을 먹을까 봐 / 댐의 이름으로 올까 봐"
여기서 댐은 포클레인이나 레미콘과 같이 자연파괴의 상징입니다. 시인이 시를 쓸 당시에는 지리산댐 건설 문제로 찬반양론으로 나뉘었습니다. 개발과 환경보호는 언제나 찬반으로 나뉘고 그럴 때마다 한 마을 사람끼리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참 아픕니다.
"내 이름은 물봉선 // 여전히 젖은 맨발의 물봉숭아 꽃입니다"
물봉선화는 물가에 자라다 보니 늘 촉촉이 젖어 있습니다. 아침 이슬 머금었을 때가 가장 예뻐 보이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물봉선화는 파괴하려는 사람은 멀리하지만, 누구든 사심 없이 지리산을 찾는 사람에겐 맨발로 뛰어나가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그렇게 준비된 꽃입니다.
무심히 피어 있는 꽃을 그냥 '참 이쁜 꽃이구나!' 하곤 지나쳤는데, 이제 주변에 피어 있는 풀꽃들을 눈여겨보아야겠습니다. 곧 봄꽃의 향연이 시작됩니다. 꽃에 깊은 관심 가지면 시인처럼 또 다른 의미를 얻는 뜻깊은 기회를 얻을지 모르니까요.
<뱀의 발(蛇足)>
제가 국어교사모임 회원들과 지리산문학기행을 두 번 다녀왔습니다. 그때마다 이원규 시인을 만났지요.
이 시인의 재산목록 1호가 '바이크'입니다. 12명의 여선생님들을 뒤에 태우고 지리산 둘레를 돌게 해주신 시인, 그래서 모임 선생님들을 지금도 만나면 그때 얘기를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