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3편 : 맹문재 시인의 '슬픈 웃음'
@. 오늘은 맹문재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슬픈 웃음
맹문재
마흔을 넘기면서 깨달은 사실 중 한 가지는
내게 슬픈 웃음이 많다는 것이다
업신여기는 사람 앞에서도
증오하는 상대 앞에서도
손해를 당하면서도
어느덧 습관이 된 나의 웃음
그리하여 전철역 계단에서 웅크리고 자는 노숙자를 보면서도
해고 노동자의 부고를 읽으면서도
엉터리 심사위원의 변명을 들으면서도
실컷 울지 못한다
텔레비전의 코미디를 보면서도
화사한 벚꽃을 보면서도
놀아달라는 아이의 투정 앞에서도
실컷 웃지 못한다.
- [사과를 내밀다](2012년)
#. 맹문재 시인(1963년생) : 충북 단양 출신으로 1991년 [문학정신]을 통해 등단. 지금은 대학교수(안양대)이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치열하게 살면서 느낀 점을 형상화한 시가 많음
<함께 나누기>
한 정신과 의사가 방송에 나와 한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나라 남자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정신과적 병이 많은 까닭은 잘 웃지 않고 잘 울지 않기 때문이라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려면 실컷 웃고 실컷 울어야 한답니다. 사내들은 어릴 때부터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강요를 받으며 자랐지요. 울어야 할 일 아닐 때 울면 사내답지 못하다는 말도 들었고. 웃음 역시 그렇습니다. 너무 잘 웃는 남자를 보면 긍정적으로 평하기보다 되려 '싱거운' 사람이라고 폄하까지 합니다.
여자들은 그에 비해 울고 싶을 때 잘 울고 웃고 싶을 때 잘 웃습니다. 특히 드라마 보면서 잘 웃고 잘 우는 게 오히려 정신건강에 도움 된다나요. 그래서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사나?
시로 들어갑니다.
"마흔을 넘기면서 깨달은 사실 중 한 가지는 / 내게 슬픈 웃음이 많다는 것이다"
슬픈 웃음, 이 시 전체를 지배하는 시어이면서 제목입니다. 무슨 뜻인지 다 아실 겁니다. 웃기는 하는데 활짝 웃는 파안대소가 아니라 입가에만 슬쩍 걸리는. 우리나라 희극인이 세계에서 가장 버티기 힘들답니다. 왜냐면 웬만해선 웃지 않으니까요. 외국에선 자그마한 웃음거리에도 반응해 주는데.
나이 들면서 화자는 슬픈 웃음이 더 많아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특히 우린(특히 남자) 잘 웃지 않거나 웃어도 슬쩍 흘리듯이 입가에만 미소 그릴까요? 아무래도 부양해야 할 가족이 생기고, 직장에선 리더로서 책임져야 할 일 많아졌고, 사회에서도 그 나이에 어울리는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일 겁니다.
2연으로 갑니다.
나를 업신여기는 사람 앞에서도, 증오하는 상대 앞에서도, 손해를 당하면서도 어느덧 습관처럼 웃는답니다. 화를 내고 분노를 터뜨려야 하건만. 아마도 나보다 "갑"의 위치에 있는 인간이 저지르는 행패에 거스르지 못하고 억지로 웃는 웃음이니까 슬픈 웃음일까요.
3연으로 갑니다.
화자는 전철역 계단에서 웅크리고 자는 노숙자 보면서도, 해고 노동자의 부고 읽으면서도, 엉터리 심사위원의 변명 들으면서도 실컷 울지 못했다고 합니다. 분명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라 눈물 흘린들 뭐라고 할 사람 없건만 애써 눈물 감추고 못 본 체합니다.
4연은 3연과 반대입니다.
텔레비전의 코미디를 보면서도, 화사한 벚꽃을 보면서도, 놀아달라는 아이의 투정 앞에서도 실컷 웃지 못합니다. 분명 활짝 웃음 터뜨리기 좋고 그리 웃는다고 누가 비웃지 않을진대 웃지 않습니다. 겨우 슬픈 웃음만 띄울 뿐.
얼굴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로 작용하지만, 마음의 표정을 그대로 담아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실컷 울고 싶어도 실컷 웃고 싶어도 그 마음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함은 우리가 사는 사회 분위기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웃음과 울음을 억제하도록 살아왔기에 잘 웃을 줄 모르고 잘 울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니 웃는다 해도 슬픈 빛이 내비치는 웃음이요, 운다고 해도 펑펑 울지 못하니 감춘 울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들 겪어보았겠지만 모임에 한 분이라도 활짝 웃는 이가 있으면 그 모임은 살아납니다. 제가 가는 모임에도그런 분이 계십니다. 별것 아닌 얘기에도 확 웃음을 터뜨리니까 다른 분들이 얘기하기가 신이 납니다. 이처럼 웃음은 사람의 벽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건만.
오늘만이라도 한 번 웃어봅시다. 슬픈 웃음 아닌 환한 웃음이나, 행복한 웃음이나, 기쁜 웃음이나...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