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 그곳은 원래 고라니가 놀던 터전이었다


그 옛날 아들이 날마다 병든 어머니를 업고 재 넘어 의원을 찾아다녔다고 하여 효재라 이름 붙은 고개를 터전으로 고라니 한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오르내리며 풀잎이나 나뭇잎, 그리고 잔 나뭇가지를 꺾어 먹으며 삽니다. 그러나 고라니들의 평화는 사람들이 공기 좋은 곳에 살고자 고개 위로 고개 위로 자꾸만 집을 지어 오는 바람에 깨집니다.


고라니들은 옛 터에서 쫓겨나 자꾸만 산 깊숙한 곳으로 옮겨가야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깊은 산에는 키 작은 나무보다 높은 나무가 많고, 나무숲에 가려 풀도 제대로 나지 않지요. 먹을 게 부족해지니 고라니 가족들은 근심이 점점 늘어갈 수밖에요.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새로 만들어진 아랫마을로 내려가 보겠다고 하자 아빠가 손사래를 치며 말립니다. 하지만 다음 날에도 다음 날에도 하도 졸라대는 아들의 청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마지못해 허락합니다.


고라니는~(1).png


헌데 점심때면 돌아오겠노라고 한 아들이 해거름이 밀려오는 데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와야 될 시간에 오지 않으니 가족들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었으면 어떡하냐고 불길한 생각마저 들 즈음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껴안다가 야단치다가 다시 껴안다는 등 야단도 그런 야단이 다 끝나고서야 아빠는 새삼 아들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좀 달라진 모습입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마른버짐이 피었던 얼굴에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습니다. 단박에 어디선가 뭘 잘 먹었다는 표를 얼굴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너 아랫마을로 가지 않았어?”

“네 그랬지요. 거기 참 먹을 게 많던데요.”

“먹을 게 많아? 설마 그럴 리가?”

“정말이에요. 내일도 내려갈 건데 아빠도 함께 가 봐요.”


아빠는 조마조마한 마음 한편,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아들과 함께 내려갔습니다. 아 그런데 정말… 아들의 말 그대로입니다. 콩 어린 순과 고구마 순이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널찍한 밭입니다.

허기진 아빠는 쫄리는 마음을 저 멀리 던지고 먹이를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밭의 남새(먹을 목적으로 기른 풀)는 힘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가시를 피해 몸을 이리저리 빼야 할 필요도, 고개를 쳐들어야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입만 갖다 대면 됩니다. 그 부드러운 순에 빠져 둘은 한참 먹다가 몸을 일으켰습니다.


다음날 가족들 모두가 떼 지어 내려왔을 때 밭 주변이 조금 달라져 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나무 울타리에 가는 끈이 보였지요. 그러나 고라니 가족들에겐 웃음거리입니다. 몸으로 툭 부딪치기만 해도 줄이 터졌기 때문이지요.

다음날 또 내려갔습니다. 이번에도 울타리가 달라져 있습니다. 가는 끈 대신 제법 튼튼한 철사로 칭칭 감긴 채 말입니다. 아빠의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집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침입을 눈치챘다는 신호입니다.


고라니는~(2).jpg


갑자기 든 살 떨리는 두려움에 그런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며 다시는 이곳에 안 된다고 말하자 모두 어리둥절합니다. 그리도 편하게 먹이를 구할 수 있는 곳인데 엉뚱한 소리를 하니 말입니다. 맨 처음 엄마가 반문합니다.

“여보 왜 그래요? 여긴 너무나 좋은데. 콩잎 먹고 싶으면 콩잎 먹고, 옥수숫잎 먹고 싶으면 옥수숫잎 먹고, 고구마순 먹고 싶으면 입만 대고 훑으면 되는데…”

“안 돼 이제 이곳은 위험해.”

“뭐가 위험해요?” 하고 대들 듯이 아들이 말합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다가, 어저께는 가는 끈만 보이더니, 오늘은 철조망까지 쳐졌잖아. 다음에 또 내려가면 더 심한 걸 설치해 놓을 거야. 안 돼, 여길 다시 더 오다간 큰 경을 치겠어.”

“아무리 울타리를 쳐놓아도 괜찮아요. 저는 제 몸길이의 세 배쯤 되는 물웅덩이도 단숨에 건넬 수 있고, 두 배가 넘는 울타리도 훌쩍 뛰어넘을 수 있어요. 이까짓 거 걱정 안 해도 돼요.”

“아니야, 단순히 울타리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아빠의 말에 다른 가족들은 겁을 먹습니다만 아들은 아닌 모양입니다. 아들은 아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음날에도 다음날에도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다시 높은 나뭇가지에 달린 잎사귀를 따고, 가시덩굴을 피해 풀을 뜯어야 했습니다. 물론 그동안에 아들은 계속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저녁때면 돌아와 들려주는 무용담에 그들도 내려가고 싶은 마음을 먹다가도 아빠가 들려준 경고에 겁먹어 내려가지 못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 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었을 때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고라니 가족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날이 밝자마자 아빠를 선두로 사람들의 밭으로 내려갔습니다. 아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울타리 아래에 아들이 쓰러져 있는 게 아닙니까? 이미 숨이 멎어진 채로 말입니다.


고라니는~(3).jpg


가장 먼저 아들에게 달려든 건 역시 엄마입니다. 하지만 죽은 자식을 살릴 수 있는 어머니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울고 울고 또 울 뿐입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몸이 뒤로 쓰러지면서 울타리에 닿았습니다. 순간 ‘파바박!’ 하는 소리와 함께 엄마도 쓰러졌습니다. 엄마가 쓰러지자 다른 자식들이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또 쓰러질 뿐이었습니다.

홀로 남게 된 아빠는 그제사 깨달았습니다. 아들과 아내를 죽게 만든 게 바로 울타리에 쳐놓은 전깃줄 때문이라는 걸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개발한 ‘야생동물 피해방지용 전기울타리’로 하여 아들도 아내도 다른 자식들도 다 죽었던 겁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아빠가 전깃줄로 걸어갑니다. 홀로 산다는 것만큼 힘든 건 없으니까요. 전깃줄에 닿자마자 튕겨 나옵니다. 불행하게도 단번에 숨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덩치가 크기 때문일까요? 이번에는 온 힘을 다하여 뛰어들었습니다. 전깃줄이 살을 파고드는 아픔을 느낄 사이도 없이 아빠는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바람이 붑니다. 고라니 아빠가 부딪치는 바람에 두 갈래로 끊어진 전깃줄이 바람에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하다가 그예 불꽃이 입니다. 이윽고 마른풀 위에도 불꽃이 옮겨집니다. 그리고 이내 온산에 불이 붙습니다. 때 마침 산 위에서 아래로 부는 바람을 타고 불길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이전 07화제17화 : 거미의 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