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1편)
십 년 전, 퇴직을 앞둔 마지막 수업 전날 집이다.
다들 마지막엔 그럴싸한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부담감에 몰리게 된다. 나도 그랬다. 다음날 그냥 재미있는 동영상 하나 틀어줄까, 아니면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할까, 그도 아니면 아주 근엄한(?) 옛어른의 말씀 전할까 고민하는데, 아내가 냄비 뚜껑 나사가 헐겁다고 해 드라이버를 사용하다가 문득 수업 내용이 잡혔다.
다음날 책 대신 ‘일반못’과 망치와 나무토막, 그리고 ‘一자 나사못’과 ‘一자 드라이버’, ‘十자 나사못’과 ‘十자 드라이버’에다 보쉬(Bosch)사 제품의 ‘전동 드릴’까지 들고 갔다. 아이들은 의아한 눈치다. 국어교사가 과목과는 전혀 동떨어진 공구를 한가득 들고 오니까.
아무 소리 않고 망치로 나무토막에 못을 박았다. 아이들은 멀뚱히 바라보고 있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숨도 죽인다. 그런 뒤 한 명을 불러내어 못을 빼보라 했다. 물론 뺄 수 없다. 머리끝까지 단단하게 박힌 못을 어떻게 뺀단 말인가.
다음 나무에 ‘一자 나사못’을 박은 뒤 한 명 불러 ‘一자 드라이버’로 돌려보라고 했다. 힘들지만 아이의 애씀대로 조금씩 빠져나온다. 이번에는 나무에 '十자 나사못’을 박은 뒤 역시 한 명을 불러 ‘十자 드라이버'를 주며 빼보라 하였더니, '一자 드라이버’를 사용할 때보다 더 쉽게 빠져나왔다.
그때사 얘기를 꺼냈다.
“‘一자 나사못’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지만 나사의 원리는 저 멀리 고대 그리스의 과학자 아르키메데스로부터 나왔다. 즉 위대한 천재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일반못’에서 ‘一자 나사못’으로의 발상 같은 건 아무나 할 수 없다. 남이 생각할 수 없는 걸 만들어내는 건 천재나 가능한 영역이니까.”
그런 다음 이번엔 ‘十자 나사못’을 들어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一자 나사못’을 사용하다 보면 쉬 망가지기에 불편함이 많았다. 80년 전쯤 중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한 미국의 '헨리 F 필립스'란 사람이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一자’ 대신 ‘十자’로 만들면 한쪽이 망가지더라도 다른 쪽은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떠냐? ‘일반못’에다 ‘一자’를 긋는다는 착상은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一’에다 ‘l’를 하나 덧대어 ‘十’로 만든다는 착상은 평범한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즉 남들이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남이 만들어놓은 것에 자신의 생각을 덧대는 것. 별것 아닌 듯이 보이는 이 착상은 평범한 사람들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허나 이 평범한 ‘생각의 덧댐’이 만들어놓은 결과를 보라. 필립스는 나중에 ‘十자 드라이버’까지 개발하여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설립했는데, 1년 만에 1000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대기업이 되었다.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 덧대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독일의 보쉬(Bosch)란 회사에서 일하던 한 이름 없는 기술자가 사람 손으로 힘들게 돌리지 않고 기계로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결과로 ‘十자 나사못 전용 전동 드릴’이 나왔다. 이를 기반으로 보쉬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부품기업이 되었다. 현재 세계 98위인데 쉽게 얘기하면 우리나라 LG그룹과 순위가 비슷하다.
‘十자 나사못’은 ‘일반못’일 때와 ‘一자 나사못’일 때는 생각도 못했던 기계화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만약 ‘十자 나사못’에 이어 ‘전동드릴’이 개발되지 않았더라면 기차나 비행기나 자동차는 물론, 컴퓨터나 휴대폰 같은 정밀한 기기가 나올 수 있었을까?”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손에 ‘十자 나사못’을 하나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여러분에게 '줄 하나 더' 슬쩍 그음(생각을 덧댐)으로써 우리 삶을 바꾼 예를 하나 들었다.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이 나사못은 1개에 10원쯤 한다. 그러니 아주 보잘것없다. 허나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 못이 우리 생활에 들어가 있지 않은 데가 없다.
그리고 ‘十자 나사못’의 개발에 이어 전동드릴까지 이어지는 개발은 그리 특출한 사람들이 한 업적이 아니다. 바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평범한 이들이 남의 아이디어에 나의 생각을 덧댐으로써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생각 덧대기’는 그냥 얻어지지 않고 꾸준한 관찰에서 나올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여러분들이 무엇을 보든 남과 다르게 꾸준히 보고 생각하는 마음만 잊지 않는다면 평범한 이들이 이뤄놓은 기적을 여러분들도 충분히 이루리라 확신한다.”
<뱀의 발(蛇足)>
사람은 죽을 때가 돼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는 말이 맞는가 봅니다. 저도 교직을 그만둘 때서야 비로소 제 잘못을 깨달았으니까요. 퇴직이 확정되면서 제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얼마나 많은 잘못을 범했는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좀 더 일찍 눈을 떴으면 좋은 가르침을 줄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가 계속되었지요.
목동이 할 일은 양을 물가까지 끌고 가는 일입니다. 물을 마시는 일은 양의 몫이지요. 그런데 좋은 교사는 물가까지 찾아가는 방법만이 아니라 좋은 물을 고르는 방법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함에도 그동안 저는 물가까지 찾아가는 방법 가르치기에만 매달렸지요. 이도 저의 주관에 따른.
아무나 할 것 같은, 아무렇게나 가르쳐도 될 것 같이 아주 쉬워보이는 물 마시는 방법. 허나 함부로 마셔야 할 물과 마시지 않아야 할 물을 구별하는 능력 배양도 꼭 필요했건만. 왜 그걸 놓쳤는지 참으로 후회가 됩니다. 이 이치를 10년 전쯤 알았더라면, 아니 5년 아니 2년 전에만 알았어도 의미 있게 마무리하고 나왔을 텐데...
*. 오늘 글은 목우씨의 일기장(2005년 2월 7일)을 정리한 내용이며,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