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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씨의 행복한 하루

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2편)

* 성호 씨의 행복한 하루 *



퇴직을 3년 앞둔 중학교 교사인 성호 씨의 하루는 얼마 전까진 짜증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날아오는 아내의 잔소리,

"또 옷을 바구니에 넣지 않고 아무 데나 던져놓으면 어떡해요!"

학교 일에 시달려 도착하자마자 빨리 쉬고 싶은 마음에 세탁바구니에 넣어야 할 옷을 화장실 앞에다 던져놓은 게 눈에 띈 모양입니다. 뿐이랴, “화장실 쓸 때 좀 안 튀기고 누면 안 돼요?” 하는 소리도 함께.


대충 아침을 때우고 차를 몰고 직장으로 나서면 또 얼마나 길이 막히는지... 사방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빵빵’ 소리. 혹 끼어들라치면 열린 차창으로 날아오는 "야 쓰벌, 누군 새치기하고 싶지 않아서 참고 있는 줄 알아!"


(출퇴근 길의 차 막힘 현상)



학교에 가 담임 맡은 교실의 문을 열면 또 엉망입니다. 하교할 때 분명히 청소 ‘싹’ 하고, 책걸상 줄도 ‘딱’ 맞춰놓았건만 줄은 헝클어지고 분필과 칠판닦이가 휙휙 날아다닙니다. 집에서 아내의 잔소리, 출근길에 들었던 욕설에 아이들이 기름을 부었으니 가만있을 수 없지요. 대뜸 고함을 칩니다.

“야, 어느 놈이야!”


점심시간 식사 후 잠시 눈 붙이려는데 반장애가 헐레벌떡 들어와 소리칩니다.

"선생님, 현우가 기철이에게 두들겨 맞아 이빨 부러졌어요."

"아, 미치겠네!"

정말 성호 씨는 미칠 지경입니다.




퇴근길에도 차는 계속 막히고, 이번에는 깜빡이 없이 끼어드는 차를 향해 성호 씨가 먼저 욕을 합니다.

"야 쓰벌, 누군 새치기하고 싶지 않아서 참고 있는 줄 알아!"

그때 그 짓을 한 차의 문이 내려가면서 얼굴을 내미는데 ‘나는 나쁜 놈이며 힘센 놈’이란 상징이 얼굴에 새겨진 사람입니다. 성호 씨는 얼른 “죄송합니다.” 하고는 쏜살같이 내뺍니다.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닫힘'을 누르려는데 저만치서 한 아주머니가 보입니다. 성호 씨는 재빨리 '열림'으로 바꾸었습니다. 1207호 아주머니입니다. 물론 아주머니라는 호칭을 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현 여사님!’ 그게 그녀를 속으로 부르는 경칭입니다. 아내보다 한 살 많은데도 열 살은 더 어려 보이고, 게다가 얼마나 상냥스러운지요. 그날도 그랬습니다.

“어머 선생님, 퇴근하시는가 봐요.”

목소리는 또 얼마나 달콤한지요. 아내의 짜증에 찌든 소리만 듣다가 이런 소릴 들으면 그냥 살살 녹는데 몸에선 또 얼마나 고운 내음이 풍기는지...




“선생님은 언제 봐도 진짜 선생님이세요.”

진짜 선생님이란 칭찬을 들은 적이 한참 오래건만 현 여사님에게 들으니 늘 듣던 소리인 양 기분이 좋습니다.

“어디 좋은 데 갔다 오세요?”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아 던진 말에,

“네 모임이 있어 나갔다 오는 길이에요.”


집에 들어서자 아내가 또 잔소리합니다.

“늦게 오면 늦는다고 전화해야지 연락 없이 늦으면 어떡해요? 찌개가 다 식었는데 다시 데워야 하나, 참.”

새삼 아내를 봅니다. 조금 전 현 여사와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얼굴에 덕지덕지 앉은 '피곤', 아래위 구분 없는 '펑퍼짐', 아무렇게나 걸친 '헐렁함'. 아 정말 싫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벗이 사진 한 장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대로 보면 찌푸린 얼굴인데 거꾸로 보면 웃는 얼굴입니다. 성호 씨는 세수한 뒤 로션을 바르다 무심코 거울을 보았습니다. 아, 거기에 짜증과 피곤에 쩐 참으로 못난 얼굴이 있습니다. 설마, 하다가 다시 봐도 자기 얼굴입니다.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았습니다. 참 어색합니다. 계속해도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다음 날 2교시 쉬는 시간에 반 아이가 유리창을 깼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교실로 뛰어갔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사고 치는 호영이 녀석이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또 이 녀석이!" 하며 손을 들었다가 순간 심호흡을 하였습니다. 그 짧은 시간 호흡 멈춤 효과 덕인지 손에 힘이 풀리면서 뺨 대신 머리를 어루만지며,

"그래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잠시 화장실에 들렀을 때 슬쩍 웃어 보았습니다. 아, 웃음이... 제대로 된 웃음이 보입니다. 그제사 벗이 보내준 사진처럼 한 사람의 얼굴에 두 얼굴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침 식탁에 앉아 젓가락질하는 아내의 손을 보면서 성호 씨가 한마디 합니다.

“오늘 보니 당신 넷째 손가락이 유난히 기네. 인터넷을 보니까 그런 사람은 나중에 늦복이 많다고 하더라.”

전 같으면 이 남자가 무슨 헛소리 하느냐며 콧방귀 뀌었을 테지만 요즘 들어 볼 때마다 뭐든 한 가지 칭찬을 하니까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도 슬쩍 자기 약지(藥指)를 봅니다. 엊저녁에는 손금을 봐준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손을 안 내밀다가 나중에 슬며시 내밀기에, 생명선이 아주 길다고 했더니 "흥!" 해도 은근히 기분 좋은 표정이었고요.




출근길에 전보다 조금 일찍 나섰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굳이 끼어들 필요가 없고, 끼어드는 차가 그리 밉지 않습니다. 3년 전 늦잠 자는 바람에 서두르다 접촉사고 난 지점에 이르렀을 때, 트럭과 승용차가 부딪혀 두 차 모두 엉망이 되어 있습니다. 운전자는 구급차에 실려갔는지 보이지 않으나 차가 저 정도라면 중상을 당한 게 틀림없습니다. 성호 씨는 마치 얼마 전까지의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교실에 들어서니 책걸상 줄은 비뚤어져 있고, 분필 조각과 칠판닦기가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 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성호 씨가 한 마디 던집니다.

“자 아침 운동 열심히 했지? 이제부터 공부할 분위기로 바꾸기!” 하는 소리에 아이들 입에서 “넷!” 하는 소리와 함께 일사천리로 자기 주변 청소를 합니다.


4교시 끝나자 교무실 알림판에 방이 나붙었습니다. '어려운 학생 돕기 성금' 적는 난이었는데, 보니까 대부분 5천 원 아니면 1만 원입니다. 성호 씨는 망설이지 않고 10만 원을 적었습니다. 그렇게 큰돈을 내느냐고 옆자리 김 선생님이 놀랐지만 그 애의 사정을 익히 아는 성호 씨는 아깝지 않았습니다.

점심식사 후 커피를 뽑으려 자판기에 갔더니 200원이 남아 있습니다. 누가 500원 내고는 커피값 300원 제하고 거스름돈을 찾아가지 않은 모양입니다. 10만 원 대신 챙긴 200원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5교시 끝나고 한 시간 쉬려는데 인터폰이 울립니다. 교장입니다. 교장과는 동갑으로 대학 동기이기도 합니다. 성호 씨는 얼마 전까지 교장이 부러웠습니다. 자기처럼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아도 되고, 교장실에 떡 하니 폼 잡고 앉아 이것저것 지시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웬일일까, 하다가 교장실로 갔더니 잔뜩 찌푸린 얼굴로 혼자 앉아 있습니다. 이러면 더욱 긴장이 됩니다. 여럿이 있을 때야 평범한 이야기일 테지만.

“정 선생, 이번 시간 수업 없지?”

대뜸 반말로 시작하는 걸 보니 사적인 이야기입니다. 한 시름 놓습니다.

“무슨 일 있어?”

“아 미치겠어.”

“왜?”

“2학년 7반 애 사건 있잖아.”


재빨리 기억의 태엽을 감아봅니다. 다행히 곧 떠오릅니다. 수업 들어가는 학급 애이기 때문입니다. 보름 전에 그 반 학생 하나가 세 명에게 얻어맞았는데, 피해 학생의 학부형이 찾아왔더랍니다. 학교장 만나러 왔다고 해서 점잖아 보여 의심하지 않고 교장실로 불러들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대뜸 책상 위에 회칼을 박았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오줌 쌀 뻔했다고 하니. 경찰이 오고 기자들이 오고, 한동안 시끄럽더니 그 학부형이 오늘 경찰서에서 풀려났다고 합니다. 그러니 저렇게 미치겠다는 소릴 하는 것일 테고요.

성호 씨는 교장실을 나오며 교장을 부러워한 얼마 전을 생각하며 슬며시 웃음이 나옵니다. 자기야 학급 애만 신경 쓰면 되나 학교장은 그게 아니니까요. 나올 때쯤 교장이 내뱉은 말이 떠오릅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솔직히 정 선생이 부럽네.”


퇴근길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닫힘’을 누르려다가 앞쪽을 봅니다. 그러나 현 여사가 이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현 여사는 이제 여기 오지 않을 겁니다. 며칠 전 아내로부터 들은 얘기로는 그녀가 바람을 피워 집을 나갔다고 하니까요. “하고 다니는 옷차림 하며, 짙은 화장에 밤늦게 나다닐 때부터 알아봤지.” 하는 아내의 말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습니다.

문을 열어주는 아내가 오늘따라 사랑스럽습니다. 피곤에 절은 못난 얼굴이 가족을 위해 희생한 사랑의 얼굴입니다. 그래선지 펑퍼짐한 몸매에는 덕이 가득 담긴 듯합니다. 일바지('몸뻬'를 순화한 말) 대신 얼마 전 사다 준 예쁜 원피스 입으면 아직도 시선을 끌 겁니다. 오늘 밤에 꼭 한 번 안아주어야겠습니다.


*. 마지막 사진은 '최창진의 교단일기에서([에듀인 뉴스], 2021. 04. 21)'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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