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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기적인 사람이 좋다(1)

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3편)

*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 좋다(1) *



김영희 씨는 중견기업 사장 비서실에서 일하는 10년 차 커리어 우먼입니다. 그녀에게는 해외 파견 중인 사랑하는 남편과 유치원에 다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소라’가 있습니다.

오늘은 ‘소라’가 다니는 유치원 재롱잔치 날입니다. 친정어머니께 부탁해놓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어제 몇 번이나 사장님에게 사정을 얘기할까 말까 달막달막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사장님 얼굴을 보면 그만 입이 다물어졌습니다.


평소 사장님의 인간성이 나빠서 얘기할 수 없다는 게 아닙니다. 회식 등의 사석에선 더없이 다정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 번이나 부도가 나 도피 생활까지 하며 지금의 회사로 끌어올린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선지 딴 건 몰라도 근무 시간 준수와 업무 처리 면에선 워낙 철두철미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 업무 중 실수하거나 사적인 일로 시간을 허비하면 바로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재롱잔치 시작 30분을 앞둔 지금 영희 씨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금 전 소라의 기분을 다독이려고 친정어머니께 전화했는데 리허설로 유치원 안이 시끄러워선지 전화를 받지 못해 더욱 속상합니다.




그때 사장님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김비서, 나 잠시 둘러보고 올게.”

사장님은 지금처럼 직원들의 근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짬짬이 사무실을 둘러보곤 한답니다. 깐깐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기에 직원들은 근무 중에 딴짓을 할 수 없습니다. 두 달 전에 해외무역부의 박 부장이 온라인으로 주식 거래하다 들킨 뒤 한직으로 옮겨간 다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장이 나가자마자 이때다 싶어 영희 씨가 다시 친정어머니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역시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아직도 시끄러워서 그런가요. 다시 걸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신호는 가는데 역시 받지 않습니다. 사장님 순회하다가 돌아오시려면 시간이 남았으니 천천히 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10분이 지나 창문가로 가 다시 걸었습니다. 그제사 어머니가 전화를 받습니다. 소라가 열심히 연습한 덕으로 리허설에 실수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서야 조금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제 잠시 후면 엄마 없이 혼자 많은 이들 앞에서 노력한 바를 보여줄 딸의 모습을 상상하니 대견하면서도 한편 마음이 무척 아픕니다.




잠시 전화를 끊은 뒤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길 가는 사람들, 그리고 싱싱 달려가는 차들, 또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곤줄박이를 보니 괜히 눈물이 흘렀습니다. 일한다는 걸 핑계로 딸의 재롱잔치는 늘 뒷전이었습니다.

“다른 친구 엄마들은 다 왔는데, 엄만 왜 안 왔어?” 하고 작년에 들은 말이 다시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러다 보니 뒤에 누가 왔는지도 몰랐습니다. 사장님이셨습니다. 화들짝 놀라 얼른 눈물을 닦고 돌아서 자리로 갔습니다. 사장님이 혹 눈물을 보았을까요. 제발 보지 않았어야 하는데….


그때 사장실에서 들어오라는 호출 신호가 비서실에 울렸습니다. 아무래도 자기 눈물을 보았다는 느낌에 쫄리는 심정을 누르며 사장님 앞에 섰습니다.

“김 비서, 지금 빨리 출장 갔다 와야 할 일이 있는데.”

“네, 최 기사님에게 준비시키겠습니다.”

“아니 나 말고 김 비서 출장이야.”

“네? 어디로 말씀입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출장이라니요? 출장을 간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비서는 항상 부속실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사장님의 지론에 10년 근무 동안 여태 손꼽는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하나유치원’으로 지금 즉시 가 봐.”

“네?”

이번에야말로 정말 까무러칠 뻔했습니다. 그곳은 바로 소라가 다니는, 오늘 재롱잔치가 열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사장님이 그곳을 안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좀 전 경리부 이 대리에게 알아봤어. 김비서 딸 소라가 다니는 유치원을.”

이 대리는 김비서와 입사 동기면서 가장 친한 사우입니다. 시시콜콜한 얘기는 물론 부부 잠자리까지 얘기 나누는 처지니 소라가 다니는 유치원을 아는 건 당연하지요.


“본의 아니게 들어오다가 김비서 전화를 엿들었어. 뭐 해 빨리 안 가고.”

“아 …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빨리 갔다 와. 시간 없잖아. 만약 제시간에 도착 못하여 소라 차례 놓치면 시말서야. 알겠어?”

김영희 씨는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빠져나와 최 기사님이 모는 사장님 전용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유치원이 보이는 모퉁이로 돌아서기 직전에 문자 한 통을 받았습니다. 사장님에게서 온 것이지요.


“김비서,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그래서 김비서가 가정일에 정신을 빼앗겨 직장일을 등한히 할까 봐 이리 한 거예요. 그러니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요. 앞으로는 꼭 중요한 가정일 있으면 미리 얘기해요.”

김 비서는 그 순간 이기적인 사장님이 너무나 좋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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