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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림이 언니 최윤순 Apr 07. 2024

빈 화분과 헤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 오래된 물건이 뭐가 있을까 곰곰이 훑어본다. 발에 차이는 오래된 어정쩡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물건을 어울리게 잘 사고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 한없이 부럽다. 물건을 심사숙고해서 샀지만, 어울림이 서툴거나 유용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쓱쓱 버릴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의 공간은 비교적 정리가 잘 되어있다. ‘언젠가 사용할지도 몰라’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무엇이든 집안에 쟁여두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그렇게 곳곳에 싸여있는 물건들은 요리조리 뒹굴리다가 결국엔 삐져나와 식구들의 눈총을 받는다. 그렇게까지 내가 끌어안고 사는 물건엔 각각의 사연이 있어서 버리지 못한다며 나름의 이유를 둔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꽃을 키운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다. 꽃을 실내에서 키우기 위해서는 햇볕, 물, 영양분, 적당한 무관심이 필요하다. 특히 햇볕은 아파트 공간에서 꼴랑 한 인간의 힘으로 끌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운 좋게 햇볕이 장애물은 아니다. 일단 우리 집에 오는 손주들은 꽃 화분에 물을 주고, 가끔 잡초를 뽑아준다. 할머니가 달걀 찜할 때마다 모아둔 달걀 껍데기는 손주들에게 신기하고 중요한 장난감이다. 손주들은 달걀 껍데기 말린 것을 미니 절구통에 빻아 꽃 맘마 주는 일을 즐긴다.

  우리 집 베란다 화분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거나 잘 키워진 화분은 몇 안 된다. 요즘 남편이 몸과 마음이 여유로워지자, 선홍빛 꽃을 피운 양란 이파리를 하나하나 닦아주며 꽃의 안색을 살핀다. 참 오랜만에 정겨운 모습을 보니 가슴까지 훈훈하다. 뜨거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지나면서 점차 빈 화분이 늘어난다. 빈 화분을 버리자고 말하면서 시나브로 꽃을 사다 심는 남편의 마음은 무엇일까? 

‘헛헛함이 스멀스멀 밀려들어서일까? 

아니면 생명체에 대한 감동일까?‘ 

  텅 빈 화분이 볼품없다고 해서 쉽게 버리지 못하는 데는 화분마다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딸들 어렸을 때부터 키워온 보랏빛 라일락꽃. 수수 꽃 다리라는 예쁜 이름 때문에 항상 그 꽃을 대할 때마다 내 가슴은 설렌다. 우리 집 라일락꽃은 매년 봄이 오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을 때 조심스럽게 뾰족한 새싹을 피워낸다. 여린 초록빛 새싹을 보면 어찌나 귀엽고 흥분되는지! 물멍, 불멍이 아닌 꽃 멍을 하며 온갖 시름을 잊고 한동안 넋을 잃는다. 

  ‘혹여나 추운 겨울에 동사를 입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그 꽃! 

  올해도 죽지 않고 어김없이 견뎌내서 은은한 향기로 가슴 설레게 하는구나!’ 

  참 고맙다. 

  우리 집 베란다의 군자란은 또 어떤가? 

  봄마다 어김없이 예쁜 주황색 꽃을 화분이 터질 듯 탐스럽게 피워낸다. 군자란은 화려한 주황색 꽃 한가운데 곧게 뻗어 난 녹색 꽃대가 있다. 그 꽃대는 자신의 위엄을 저절로 드러낸 듯 위로 쭉쭉 뻗어 난다. 두 개의 군자란 화분은 앞 다퉈 피며 오랫동안 우리 집 베란다 꽃들의 미모를 담당한다. 

  하지만 추운 겨울이 지나면 많은 꽃이 죽어서 빈 화분만 덩그러니 남는다. 우리 집에는 내가 지정한 화분 치유 실이 있다. 그곳은 바로 에어컨 실외기 위다. 물론 꽃이 크기에는 좋지 않은 장소지만 포기하지 못하고 애정하는 장소다. 꽃을 키우는데 햇볕, 물, 영양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외에 꽃을 피워내기 위해 또는 식물이 싱싱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주 중요한 것들이 필요할 것이다. 

  ‘어찌 인간이 미물이지만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꽃들의 이치를 꿰뚫을 수 있을까?’ 

  나는 꽃이 피어 나가기 위해선 비, 바람, 눈보라, 태풍, 번개, 벼락까지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자연의 온갖 풍파와 맞서며 햇볕 듬뿍 받고 자란 화단의 꽃들과 식물이 있다. 그것들은 그냥 실내에서 목 길게 내밀며 받아먹는 햇볕과 간간이 열어둔 창문의 바람만으로 살아남는 꽃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뿌리가 죽었다고 화분을 덜렁 버릴 일은 아니다.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식물의 뿌리만 살아있었는데 그다음 해에 의연히 꽃을 피워냈던 생명체에 감탄했던 때가 있었다. 뿌리만 살아 있다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생각을 절실히 느꼈던 감격의 순간이었다. 젊은 시절 또는 사춘기 때 주체할 수 없는 격정의 시간을 보내다가 가족의 바른 정신이 몸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면 언제든 돌아와 제 몫을 다하는 젊은이들을 보라.

  이번 여름 내내 에어컨 실외기에 방치해 두었던 라일락이 어느 늦가을에야 눈에 들어왔다. 물을 준다고는 했지만, 강렬한 땡볕에 타들어 가는 것이 너무 안쓰러워 베란다에 옮겨 두었다. 그 라일락은 시절을 세세하게 알진 못했겠지만 자기가 견뎌왔던 공간보다 포근했던지 이런 엄동설한에도 보라색 꽃을 피우고 향기까지 품어내주었다. 그 순간 행복감이 스멀대며 전신에 퍼지는 걸 느꼈다. 은은한 라일락 향기를 맡으며 기분은 좋았지만, 한동안 방치했던 나의 게으름과 미안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추신 : 꽃도 사람과 비슷한 지 한 때 시절 모르고 자기 능력보다 더 피워내 우리를 기쁘게 했었다. 원래 봄이어서 제대로 자기 역할을 다해 향기 진동하며 보랏빛 라일락을 기대했는데 간신히 버티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2023년 11월 말경)   


(2024년 4월 초순 간신히 꽃봉오리 피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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