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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림이 언니 최윤순 May 21. 2024

파란 하늘에 뜬 하얀 달

   




  유치원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와 ~~~ 달이다.”

  “어디?”

  “할머니? 저기 하늘에 하얀 달이 떴어요.”

  “그러네!

  밝은 대낮, 파란 하늘에 뜬 하얀 달이 예쁘다!

  밤에 나온 달이 돌아가지 못하고 왜 낮에도 하늘에 떠 있을까?”

  나는 세 살 손자도 달을 쳐다보라고 얼른 고개를 올려주었지만 자꾸 아래만 내려다본다. 다시 손자의 머리를 올려줬다. 그때야 손자 눈에 달이 들어온 것 같았다.        

 “달은 밤에는 노랗게 보이는데, 왜 낮엔 하얗게 보이지?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텐데.”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할머니? 달은 원래 낮에도 노란데 밝아서 하얗게 보여요.”

  “유정아, 혹시 책에서 봤어?”

  “아니요. 내가 혼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유정아, 그 말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주었다.

  “할머니, 그런데 설득력이 뭐예요?”

  “모르는 것도 누가 잘 설명해 주면 알게 되는 거야?”

  우리는 놀이터에서 놀다가 집에 돌아와서도 베란다 너머로 달을 찾았다.

  “할머니, 달이 안 보여요?”

  “달, 달 저기?” 세 살 손자도 밖을 내다본다.

  베란다 창 너머로 달이 희뿌연 하게 잘 보이지 않았다.



  손녀는 “엄마, 파란 하늘에 달이 떴어요.”라고 종이에 크게 써놓았다. 엄마가 오면 알려줘야 한다고. 가끔 베란다 너머로 달이 어디만큼 갔는지 확인했다. 달이 더 높이, 더 멀리 움직여서 이젠 우리 정수리에 있다고 말해 주었다.

  두 손가락을 내 머리에 올리며

  “얘들아, 여기가 정수리야. 할머니 정수리 만져 볼래?” 손주들은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열심히 만진다.

  “할머니? 느낌이 이상해요.”라며 저만치 도망친다. 그 모습도 너무 귀엽다.



  “할머니, 저건 하현달이지?”

  “글쎄, 무슨 달이지? 상현달인가? 하현달인가?” 나도 궁금했다.

  그런데 그날은 1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지였다. 내가 아침에 가지고 간 동지 팥죽을 손주들은 맛있게 먹었다.

  “유정아? 오늘이 동지니 하현달이 맞다.”

  “어떻게 알았어.”

  “아빠와 달 공부를 한 적이 있어요.”

  손녀는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을 종이에 그렸다.

  “초승달, 상현달은 왜 그리지 않았니?”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할머니, 보름달은 15일에 뜨죠?

  그러면 하현달은 언제 떠요?

  얼른 인터넷으로 찾아봐요.”

  나는 손녀의 호기심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검색했다.

  “하현달은 음력으로 22 ~23일이네. 상현달은 7~8일, 초승달은 2~3일에 뜬대.”

  하지만 손녀는 복잡한 지 더 이상 할머니의 설명을 듣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우리 유정이는 어릴 때도 하늘을 자주 올려다봤었는데. 지금도 그렇구나!

  아주 좋은 습관이고 좋은 생각이야.

  그래서 가끔 생각지 못한 멋진 자연을 관찰할 수 있었지.

  지나가는 구름을 보고 양털 모습 같다고 말했어.

  하얀 연기 내뿜고 잽싸게 날아가는 비행기도 봤지.

  장마 끝나고 무지개도 자주 봤잖아.

  운 좋을 땐 쌍무지개도 봤었지. 정말 황홀했었는데!”

  자연을 관찰하는 자세가 좋다며 손녀 등을 토닥여 주었다.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솜사탕처럼 부웅 떠다니는 것 같아요.”라며 손녀는 환하게 웃었다.

  발음도 잘 안 되는 세 살 손자는 오늘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 구름빵, 새, 나무, 비행기”라고 외친다.

  피카소는 “모든 아이는 예술가다. 문제는 우리가 어른이 된 후 ‘어떻게 예술가로 남을 것인가’이다.”

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원래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는가?’

  어른들은 전진만 할 뿐 눈을 돌려 위를 보거나 멈추어서 보지 않는 것 같다.

  어른인 나도 언제부턴가 하늘을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올려다본 기억이 거의 없다. 뭐가 그리 바쁜지! 내 시야에 적당히, 평온하게 펼쳐진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놓치며 살아간다.



  어느 날 안과에서 검은 천을 둘러쓰고 고성능 자동 시야기로 검사를 했다. 위, 아래, 좌우로 어느 선까지 볼 수 있는지 빛의 민감도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빛이 곳곳에서 번쩍번쩍하는 순간 버튼을 눌러야 했다. 검사하는 동안 조금 불안했다. 내 시야가 점점 좁아진 것을 검사자인 나도 인지할 수 있었다.


  ‘신기해서일까?

  아니면 머리 위의 다른 공기 맛을 느끼기 위해서일까?’

  아이들은 오늘도 그네를 타며 머리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본다.

  “할머니 아파트가 거꾸로 보여요. 나무도, 미끄럼틀도 거꾸로 보여요.”

  세 살 손자는 아예 미끄럼틀 위에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눕는다.

  그 옆에 손녀도 나란히 누워

 “하늘, 구름, 새가 날아가요”하며 눈에 보이는 것들을 열심히 조잘거린다.

  그런 아이들 모습이 재밌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나도 바쁘게 생활하면서도 틈틈이 넓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푸드둥 힘차게 날아가는 새도 본다. 길가에 핀 꽃들을 눈여겨본다. 눈부신 태양, 폭신한 구름, 푸르른 나무를 눈앞에서 볼 수 있어서 무한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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