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요즘 이 말을 실감하며 산다. 딸 집 바로 앞에는 작은 놀이터가 있다.
그곳엔 적당한 그늘, 선선한 바람과 놀이 기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손주 육아 동지들의 보살핌이 있다.
세 살 손자가 어린이집에서 하원할 때 그런 유혹을 사심 없이 지나쳐 오기는 힘들다. 때때로 그곳에
아이들이 하나도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손자도 수월하게 집으로 향한다. 집에 와서도 가끔 베란다
너머로 노는 아이들이 있는지 확인한다.
“하무니, 저기 앞집 누나 있다.”하며 나가자고 내 손을 끌어당긴다.
이 조그마한 놀이터는 학교 같다. 다양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들고난다. 오후 세 시쯤에는 중학생들이 학원 가기 전 잠깐 짬을 내서 놀고 있다. 그들이 떠난 후에 어린이집, 유치원 아이들이 하원하는 시간이다. 그때부터 아이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든다.
어느 여름 이 조그만 놀이터에 아이들이 너무 많이 있었다. 그 열기로 폭발할 것 같아 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 한 엄마는
“와아~~~ 여기가 에버랜드보다 사람이 더 많아요.”
물론 같은 아파트 단지에 서너 개의 놀이터가 더 있다. 그런데 그곳들은 햇볕이 너무 강하거나 놀이기구가 아이들에게 맞지 않아 놀기가 어렵다. 하루 종일 적당한 그늘과 바람이 불어서 보호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몰려든다.
그다음에는 학원에서 돌아오는 초등생들이 함께 뒤엉켜 논다. 그럴 땐 내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큰 아이들이 노는데 너무 심취해서 내 귀한 손주들이 다칠까 봐 나도 모르게 희번덕거려진다. 물론 그곳에는 다른 아이들의 보호자들이 있다. 이모님일 수도, 엄마, 아빠일 수도, 할머니, 할아버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안전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내 아이, 네 아이 할 것 없이 서로서로 눈여겨봐 준다. 순간적으로 어려움에 부닥칠 땐 즉시 해결해 준다.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어찌 이리 잘 생겼냐! 안 본 사이에 엄청나게 예뻐지고 키도 많이 컸네.”
라며 격려와 칭찬의 말을 끊임없이 해준다. 아이들은 그런 말을 듣고 자란다. 그런 한 마디 한 마디는 아이들이 커가는 데 귀한 영양제가 될 것이다.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돌아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로 자라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일곱 살 손녀 친구 엄마는 날마다 새로운 간식거리로 우리 손주들의 몸과 마음의 허기를 달래준다.
기껏해야 마트에서 산 과자 봉지 들고나간 할머니는 부끄러워 내민 손을 슬그머니 뒤로 감춘다.
그녀의 퀄리티 높은 간식으로 우리 손주들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지고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반짝인다.
손자는 그녀의 맛 좋은 간식과 따뜻한 보살핌이 고마웠는지 등원 때마다 그 엄마 품에 덥석 안겨 주위
사람들과 사위를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아무리 준비해 가도 영양 면, 다양성 면에서 퀄리티가 높아지는
그 엄마의 간식을 넘어설 수 없다. 나는 그 사실에 매번 놀란다.
우리 손주들은 하원 때마다 자동으로 그 엄마 어깨에서 달랑거리는 간식 보따리에 먼저 눈길이 간다. 우리 손주들의 우상이고 희망 보따리다. 나도 간식 보따리를 신경 써서 챙겨가지만, 그녀의 간식은 절대적이다. 다꼬 야키, 레몬 빵, 수박, 에어프라이어로 만든 딱 한입 크기의 깔끔하고 담백한 맛의 고구마 과자까지. 놀이터에 앉자마자 우리 손주들은 그녀의 간식 보따리가 풀리기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기다린다.
손주들은 침을 한번 꼴깍 삼키기도 한다.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특히 놀 때 예기치 않은 사람이 슬쩍 입속에 넣어주는 맛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무엇인가를 나누어 먹은 기억은 세월이 지나도 잘 잊히지 않고 그 사람을 소환한다. 매번 내가 준비한 간식 보따리는 그냥 풀어보지도 못하고 가지고 오는 날이 많다. 어떤 날은 그 엄마에게 내 간식을 나누어 주라고 보따리 채 맡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세 살 손자를 따라다녀야 하므로 가지고 간 간식도 제대로 챙겨주기 어렵다. 그녀는 내가 손자를 따라다니는 동안 그네도 밀어주고 엉킨 줄넘기 풀어주며 손녀가 원하는 것까지 해결해 주는 정말 고마운 육아 동지다.
우리 손녀는 눈물이 많다. 자기 말이 통하지 않거나 할머니나 동생이 자기 말에 집중하지 않을 땐 잘 운다. 눈물 많은 손녀를 꼭 안아주는 또 다른 엄마가 있다. 그녀는 손녀를 따뜻한 품으로 보듬으며 무언가
귓속말을 한다.
“뭐가 억울해서 우는지? 누가 힘들게 했는지?”
모두 들어주고 해결책도 제시해 준다. 다른 애들 몰래 달콤한 젤리나 비스킷을 손에 쥐여 준다.
손녀는 너무 포근해서인지 그 엄마 품을 좀처럼 벗어나려 하지 않고 오랫동안 안겨있다.
그녀는 가끔 할머니가 손주 돌보느라 힘들다며 딸기, 방울토마토, 오렌지가 든 과일 컵도
사다 주고 따뜻한 커피도 건네준다.
그녀는 주말에 놀이터에서 우리 딸을 만나면 할머니가 항상 웃는 얼굴로 손주들과 소통한다고 전해준다.
직접 공도 차주고 비눗방울 놀이도 해주고 위험한 놀이기구 탈 때도 꼭 지켜본다고. 그렇게 잘 놀아주는 할머니는 드물다고 적극적으로 대변해 준다. 물론 모든 보호자는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아이를 돌보는 것은 아니다. 안전이 제일 중요하니까 나도 모험심이 강한 세 살 손자를 밀착 방어한다. 높은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는 것은 상당한 팔 힘이 필요하다. 그런 모험을 서슴없이 하고 싶어 하는 손자를 말릴 수도 없고 말려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 등 뒤에서 손만 대고 힘내라고 응원을 퍼붓는다.
보통 사람들은
“밭에서 풀 뽑을래? 애기 볼래?”하면 밭에서 풀 뽑는다고 대답한다.
“애 봐주는 공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딸과 사위에게 조금이라도 할머니가 돌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면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손주 돌볼 때는 안전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그저 졸졸 따라다니며 아이들이 하는 것에 진심으로 반응한다. 내가 손주들을 진심으로 돌봐주지 않으면 제일 먼저 남이 알고 손주가 알고 제일 나중에 내가 안다.
손주 육아 동지들의 값진 한마디 한마디는 반향으로 내게 돌아온다. 딸과 사위는 하원 후에 나와 손주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없다. 다른 동지들이 관찰하고 지켜본 상황을 전해준다. 그래서인지 요즘 딸이 변하고 있다. 어느 날
“엄마 내가 반차 쓸 테니 언제가 좋아요?”
“왜?”
“요즘 날이 너무 좋아서 엄마가 좋아하는 골프 라운딩 가라고 반차를 쓰려는데 좋은 날짜를 말해주세요.”
엄마 마음 알아주고 챙겨주는 딸이 고맙다. 아침마다 두 아이 등원시키느라 진땀 빼는 사위도 고맙다. 사실 나는 사위보다 육아 동지들을 더 자주 만나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이런 달콤한 휴가도 모두 나의 육아 동지들 덕분이다.
육아 동지들은 각자 가지고 온 간식거리를 나누어 먹이며 웃음꽃 활짝 핀 얼굴로 귀한 마음을 전하고 정을 나눈다. 서로 깊은 말은 하지 못하고 눈인사로 대신하지만 그들이 고맙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낀다.
주말에 텃밭에서 딴 상추와 쑥갓 등 채소를 조금씩 담았다.
예쁜 꽃 달린 양말 몇 켤레를 사 두었다.
다음에 육아 동지들 만나서 나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