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 시부럴, 킵 고잉! 가보자고~
듬직 듬직, 흰 티에 편안한 바지 차림으로 홀가분히 백팩을 둘러메고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공항에 들어선 여성이 있다. 한치의 망설임 없이 뱉는 유창한 영어와 시종일관 덤덤한 표정으로 모든 일에 능숙한 사람. 국경을 넘나들어 걷다 보면, 조금은 더 특별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만 같다. 내가 꿈꾸던 산티아고에 오를 출국자의 모습은 이러하다. 동떨어진 또 한 가지. 기내에서 조곤조곤 글을 적어 내려갈 줄 알았다. 현실은 오매불망 기내식만 축내고 있는 식욕으로 똘똘 뭉친 욕망 덩어리다. 술은 곁들여 얻을 수 있는 취기는 덤. 설렘과 낭만을 듬뿍 담아 공항 감성을 느끼기에 충분한 아메리카노를 들고 탑승을 기다린다. 이제야 비로소 실감 난다. 두근두근!
장시간 비행 끝에 마주한 파리 공항. 보기만 해도 마음 편해지는 태극마크를 단 비행기를 타고 온 덕분에 심리적 안정감이 최고조에 달한다. 10kg 육박하는 짐을 메고 소매치기가 득실거리는 지하철에서 시간을 낭비하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파리 공항에서 시내까지 택시 요금은 정찰제로 58~62유로 사이다. 정찰제라는 세 글자에 경계심이 와르르 해제된다. 사기당하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며 안일한 마음으로 45분을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거스름 돈 받을 요량으로 무턱대고 100 유료 지폐를 냈다. 트렁크에서 짐을 빼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기사는 나머지는 팁!이라는 말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 염병.
내가 이렇게 한심했나 싶다. 택시 타기 전 요금을 미처 확인하지 않은 것도 쪽팔린다. 언어장벽에 부딪쳐 눈물 쏙 뺀 20대 어느 날이 떠올랐다. 억원한 상황에서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엉엉 울던 그날. 이쯤 되면 영어능통자가 되어 유창하게 구사하겠다는 포부를 가질 만도 한데, 그날 이후 온갖 더러운 감정을 담아 영어로 찰지게 욕하는 연습에 매진했다. 갓 구운 식빵 같은 쌍시옷 난무하는 언어로 맞섰다면 달랐을까.
동행자가 숙소에 짐을 풀며 인터넷 검색을 하는데, 이미 나와 비슷한 피해자가 수두룩하다. 제 아무리 잘난 사람도 표적이 되는 순간 판단력이 마비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하나 보다. 캐리어를 들고 줄행랑치는 기사부터 완벽한 범죄를 꿈꾸며 ATM기 앞에서 현금을 강요하는 기사, 심지어 목을 조르고 냅다 도망갔다는 잔악한 기사의 글까지 보고 나니, 묘한 위안이 된다. 사기는 절대 당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구나. 사기꾼일 거라고 의심하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수치심에 자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첫날부터 적잖게 당황했을 동행자에게 드는 미안한 마음은 쉬이 가시질 않는다. 생각보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순탄하지가 않다. 여기서 또 한 명의 국제 호구가 탄생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