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레네 산맥을 처음 넘는 당신에게 꼭 전하고픈 말.
피레네 산맥 넘지 않은 사람은
말도 하지 말랬다.
목숨이 하나인지라 폭우를 헤치고 걸어갈 마음은 없다. 비를 핑계 삼아 지옥행 피레네 산맥을 하루라도 늦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심 기대해 본다. 멀뚱히 서서 구름의 동태를 살폈다. 새벽 5시 하늘은 컴컴해서 뵈는 게 없지만, 공기가 머금은 습도로 미루어 보아 비가 쏟아질 날씨는 아니다. 순례자로서 긴장과 설렘의 첫 발을 내딛는 날인데, 생각보다 덤덤하다. 해드렌턴은 없지만 사람과 동물의 형체는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아, 알베르게를 나와 사진 한 장 남기고 씩씩하게 출발 ~
마을을 빠져나오니, 순례자 사무소 현금언니의 설명대로 두 갈래 길이 보인다. 오른쪽은 완만한 발카로스, 왼쪽은 급경사의 나폴레옹 길이다. 일생의 중대한 일은 한계를 넘어서 무리할 때 비로소 이루지 않았던가. 육체적 한계를 맛볼 수 있다는 고도 1,430m 레푀데르 언덕을 향해 나폴레옹 루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시작되는 오르막이다. 등뒤에 마을이 점점 작아지고... 나도 점점 땅속으로 파묻혀 작아진다. 살인적인 배낭의 무게까지 더해졌다면, 다채로운 피레네 후일담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오늘만큼은 겸손해보기로 한다. 동키 서비스 덕분에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없으니 행복했다. 혹여 고민하는 분이 있다면 꼭 이 말만큼은 전하고 싶다. 꾸역꾸역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죽을힘을 다해 힘껏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타인의 속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롯이 나만의 페이스로 나아가면 된다.
적막 속을 걷다가 반짝거리는 샛노란 이정표에서 귀여움을 탐지했다. 정말이지 너무 좋다. 이정표를 따라 걷는 순간만큼은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가 된 느낌이 든달까. 전투적으로 행군하듯 걷고 또 걷는다. 주변을 둘러볼 겨를 없이 걷는데 눈앞에 자연과 어우러진 마을 온또가 보인다. 오르막이 끝나고 능선에 접어들자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대자연의 경이로운 풍광이 펼쳐졌다. 알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순례자들이 이 장면을 눈에 담기 위해 일찍이 나갈 채비를 하나보다. 마음속 일렁이는 감정을 느끼며 일출을 맞이하는 하루라니. 인생에서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다.
피레네 산맥은 일 년 중에 300일은 안개로 둘러 쌓여 있다고 한다. 에세이를 봐도 자욱한 안개가 신비감을 자아낸다나 뭐라나... 이런 황홀함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이 고작 두 달이라니. 피레네 요정이 우리들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첫날부터 열렬히 응원하고 있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피레네 요정이 누구냐고? 이 산에는 머나먼 옛날부터 전승되는 슬픈 전설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에우리스테우스가 부여한 열 번째 과업인 게리오네우스 황소를 얻으러 가는 중 나르본을 지나게 된다. 이 나르본 지방의 왕은 기꺼이 궁정으로 초대하여 대접했는데, 술에 잔뜩 취한 헤라클레스가 강제로 왕의 딸인 피레네를 취하고 만다. 얼마 후 그녀는 뱀을 낳았고 공포에 질려 숲 속으로 달아났다가 산짐승에게 죽임을 당한다. 귀향하던 헤라클레스는 피레네의 소식을 듣고 찢긴 그녀의 시신을 모아 묻어주었고, 죽음을 기리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따서 피레네 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욱한 안개가 깊은 산속 어딘가에 몸을 숨겨 흐느끼고 있을 그녀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아린다. 차라리 안개 짙은 보슬보슬 이슬비 내리는 산맥을 넘는 것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할 것 같다. 목숨 타령하며 폭우를 헤치고 걷지 않겠다는 옹졸함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진한 여운을 안고 다시 오르막길에 올랐다. 조금만 더 오르다 가는 바람에 날아가게 생겼다. 멍 때리고 있으면 어김없이 휘청거린다. 개 같은 바람. 바람에 등 떠밀려 피레네 산맥을 넘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역방향으로 부는 바람 때문에 풍력발전기가 따로 없다. 이대로라면 전기도 생산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윤언니는 뒤로 휙 돌더니, 뒤로 걷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한동안은 괜찮았다. 꿀팁 아리가또.
휘청휘청 걸어가다 보니, 도둑 바람이 내 귀도리를 앗아갔다. 출발 전에 알베르게 사람들이 귀도리를 한 나의 모습이 귀엽다고 극찬했던지라, 기묘한 상실감이 들었다. 분명 누군가 목격했을 텐데, 말 한마디 해주지. 극 내향인이어서 마음 졸이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믿고 싶다. 이 길의 끝에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남는다던데, 벌써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거센 바람에 휘리릭. 짐 챙기다가 빠뜨려서 아디오스. 막상 없어져도 불편하지 않은 걸 보면 그간 얼마나 편의에 길들여져 살아온 걸까 반성하게 된다.
<바람이 분다>의 catchphrase 같은 오늘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어떤 상황이 와도 삶은 계속되는 것처럼. 오늘도 잘 걷고, 오늘도 잘 살았다.
연재 요일을 맞추려고 "덤벼라, 세상아!"라고 타이핑 중인데, 부모님이 마주 보고 밤 인사를 나눕니다.
"여보~ 꿈속에 나타나지 마요~"
- 응, 당신도요~
벌써 10시구나.
10시면 이불속으로 들어가는 집안 내력 때문에 남은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된다.
(... 내가 마감을 지킨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