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어서 봉쥬나라에서 올라 나라까지
먹는 것 외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양 떼와는 달리, 말은 피레네 산맥의 리트리버다.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하게 해찰 부리는 모습이 은근히 나의 산티아고 동행자 하윤언니를 닮았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서서 꼬리를 설렁설렁 거린다. 앞선 기타를 둘러멘 낭만 순례객이 말을 살갑게 쓰다듬는 순간, 이민호 주연의 드라마 <더 킹 : 영원의 군주>의 한 장면이 된다. 극 중 이민호는 스페인 혈통의 귀한 백마 맥시무스에게 여주인공이 주는 당근을 먹지 않았다며, 물고라도 있으라고 핀잔을 줬다. 줄 당근도 없는 주제에 질척거려 본다. 햇밤색의 맥시무스도 나랑 친해지고 싶은 눈치다. 큼지막한 몸집과는 달리 다정함을 지닌 이 녀석이 다가올수록 도망가고 싶어지는 것은 왜일까. 의도치 않게 말과의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며 끊임없는 오르막을 올랐다. 유럽의 언덕은 완만하니, 밋밋하다. 그냥 좀 더 높은 곳을 언덕이라고 부르나 보다.
넓게 펼쳐진 완만한 오르막을 하염없이 걷다 보면, 저 멀리 피레네의 오아시스! 푸드트럭이 나온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초원에 오직 순례자들을 위해 자리하는 마음이 고맙게 느껴져서 바나나와 핫초코를 샀다. 실은 타고난 식탐으로 음식에 대한 애정이 유난스러워서 궁금한 음식은 먹어야 마음이 놓인다. 할아버지는 잔돈을 거슬러주며, 한국어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암만 봐도 50가지 언어는 거뜬히 구사할 수 있을 것 같은 눈치다. 반나절 지켜본 순례자들 대부분이 바리바리 싸와서 주섬주섬 꺼내먹으며 하루종일 걷는다.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라는 난제의 답은 항상 전자였는데,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평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살아있는 기쁨을 온몸으로 만끽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다 맛있다.
계속해서 오르니, 이번에는 피레네의 겨울이다. 해발 1,379m 롤랑의 샘 주변에는 설원이 펼쳐졌다. 길 위에서는 날씨를 종잡을 수 없다. 반나절만에 사계절을 넘나들고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 숙소를 떠날 때에는 꽃샘추위로 스산한 봄 같았다. 이내 곧 햇살 한 줌, 바람 한결이 더해지며 서늘한 여름 같다가도, 낙엽이 소복이 쌓인 길을 걸을 때는 영락없는 가을이다. 이제 뽀드득 거리는 눈까지 밟으며 겨울이 더해졌다. 이윽고 나바라 표지석이 나왔다. 아무런 생각 없이 걷던 나는 하마터면 지나칠뻔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심한 하윤언니는 여기부터가 스페인 국경이라고 했다. 몇몇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는 걸 보니, 아마 국경인지도 모르고 지나가는 순례객들이 더 많을 것 같다. 처음으로 걸어서 국경을 넘는데 기분이 묘했다. 별다른 입국심사 없이? 우리나라는 두 발로 넘어갈 수 있는 곳이 없는데, 원래 남의 나라 땅은 이렇게 넘기 쉬운 건가 보다. 여권에 입국도장도 안 찍어주다니. 이제 더 이상 고마워도 메르씨~라고 외치면 안 된다. 무챠 그라시아스!
해발 1,430m 레푀데르 언덕에 위치한 helpoint에 이르자, 사진을 찍어달라며 누군가의 다급한 손짓이 느껴진다. 이스라엘에서 온 이자벨이다. 그녀의 매부리코는 얼핏 보면 마녀를 연상케 하지만, 엄청난 긍정에너지를 지닌 아주머니다. 이제부터 그녀를 호호아줌마로 칭한다. 왜냐면 웃상이다. 만난 지 몇 초만에 내적 친밀감이 든다. 거리낌 없이 금방 친해지는 행복의 표정이 짙게 배어있는 사람들이 좋다. 금방이라도 전염돼서 나까지 기분 좋아지는 것 같아. 오늘 루트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라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노란 이정표를 깜빡했다. 화살표가 없음을 직감한 호호아줌마는 나를 불러 세웠다.
“아가, 이 길이 아닌 것 같아.”
부끄럽게도 나는 호호아줌마의 baby로 불렸다. 길을 찾는 그녀에게서 이스라엘 여자들 특유의 강인함이 느껴졌다. 역시 여자들도 2년 군필자의 나라는 다르구나. 늑대가 달려들어도 때려잡아줄 것 같아서 졸졸 따라다니고 싶었지만, 곧장 내리막이 나왔고 아줌마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내리막은 게걸음으로 조심조심 내려가야 제맛.
아직 하루밖에 안 걸었지만, 비워내는 여행은 짐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가는 순례객에만 해당되는 느낌이 든다.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고자 모조리 짐을 당나귀에게 맡긴 쫄보 순례자는 첫날부터 느끼는 바가 많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게 건넨 미소를 기억한다. 전우애가 느껴지는 눈빛들. 이 날의 기억만으로 마음 평온해지는데,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당분간은 산맥을 넘던 포근한 날의 기억 속에 갇혀 살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