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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구석작가 Aisha Jun 19. 2024

[산티아고] 선지름 후수습형 인간

 - 남자 찾아, 산티아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론세스바에스 알베르게 안착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9시간 동안 걸은 역사적인 날이다. 하루종일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마주하니, 내가 한없이 작아 보인다. 인간은 나약한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라 신에게 의탁하고 살아가나 보다. 공립 알베르게에서는 체크인 전에 모든 순례객에게 국적, 나이, 목적에 대한 설문을 한다. 백명의 순례객이 있다면, 백가지의 이유가 있을테지만, 생각보다 선택지가 단출했다. 


갈망하는 마음에는 끝이 없다. 내가 이 길에 오르고 싶었던 시작은 어디였을까. 처음 산티아고를 알게 된 것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읽은 책 한 권에서 시작된다.  <남자 찾아, 산티아고> 발칙한 노처녀(?) 이야기인데, 하루빨리 그녀가 운명의 남자를 만나 제발 좀 손잡고 떠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하나되어 읽었다. 고작 1일 차 순례객이지만, 운명의 남자를 여기서 만나기는 좀. 이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은퇴 아니면 백수인 것 같다. 사실 조금 더 이르게 올 수도 있었다. 대학 동기와 사직서와 맞바꾼 산티아고행 티켓팅을 결심한 적이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의 열망은 사그라들었고 추진력이 남달랐던 친구는 홀로 길에 올랐다. 종주하고 돌아온 그녀는 냅다 결혼을 해야겠다며 남자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고, 지금은 결혼에 골인해서 아들을 낳고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 아이가 없으면 결혼은 무쓸모인 것 같다는 마인드를 장착한 채 말이다.






미래를 담보로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살았더니, 어느 순간 쳇바퀴 굴러가는 듯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다. 반전을 꿈꿀 수 없이 잘 짜인 시나리오 같달까. 불안하다는 핑계로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었다. 그 각본을 찢으려 고민하기 시작하면 늘 고민의 끝에는 용기가 반토막 나 있었고, 하지 말아야 할 이유만 백가지 만들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크고 작은 생각의 덫에 걸려 시행착오 끝에, 지금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던 내가 돌다리 위에서 다이빙 준비를 한다. 고민보다 행동이 앞서는 선지름 후수습형 인간으로 거듭났다. 물론 여전히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휘청이고 있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막상 시작하고 나면 막막해 보이던 것들이 만만해진다는 것이다.  




론세스바에스 알베르게는 신관과 구관으로 나뉘어 있는데, 신관은 미리 예약한 부지런한 자들의 몫이다. 힘겹게 걸어온 순례객을 배려하여 그들에게 신관을 배정해 줄 법도 한데, 이런 방식으로 선결제를 유도하다니… 돈독이 제대로 오른것 같다. 동양인을 한 데 모아준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맞은편 침대는 동양인! 무려 생장 순례자 사무소에서 만난 오삼부부가 배정받았다. 까미노 매직이 이런 건가. 원래 그들은 은퇴하고 산티아고 길에 오른 오산에서 온 부부를 따서 만든 <오산부부>였는데, 내가 아저씨 직장을 단박에 맞추는 바람에 <오삼부부>로 개명 했다. 은연중에 느껴지는 대화에서 대기업 출신임을 감지했는데, 걸정적인 단서가 된 것은 한눈에 파악하기 쉽게 체계적이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스프레드 시트였다. S사 특유의 완벽에 가까운 계획성에서 기인한 당찬 느낌이랄까. 아마 간추려서 한 장으로 정리하는데 성공했다면, 여기서부터는 L사다.


(나의 동행자와 아주머니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나: 혹시 은퇴한 직장이 S사인가요? 특유의 느낌이 나서요.

오삼아재: 큰일 났네, 우리 마누라가 그 느낌 엄청 싫어하는데, 28년 근무하고 은퇴한 지 3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티를 못 벗었나 보네…


아재는 화들짝 놀라며 한탄형 인간이 되었고, 나는 S사를 구분하는 특별한 능력인 삼별력을 얻었다. 오삼 아주머니는 일상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심각한 원인 모를 피로감에 시달리다가 지금은 원인을 알고 수면 무호흡 기계의 도움을 받아 길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수면 호흡 시에 거친 숨소리에 대해서는 미리 양해를 구해주신 배려가 고마웠다. 매일 기적을 만나고 있는 것 같다.


알베르게에서 제공되는 순례자를 위한 메뉴 델 디아를 먹으려 나가려는데 은방울 자매를 만났다. 200여 석 정도 규모의 대형 알베르게라 예약번호가 없이는 체크인이 어려운데, 호주에 있는 딸이 연락을 안 받아서 체크인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단다. 언어 구사력도 없이. 예약도 할 줄 모르는데, 무턱대고 여기 왔다고? 와, 무식한데 용감한 게 딱! 내 워너비다. 나보다 앞서 경험한 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몸으로 부딪히는 중이라니, 워너비 자매님들을 향해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었지만 오삼아재는 그녀들의 무모한 도전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삼아재 감성으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일 같아. 긴 말은 하지 않겠다.


여기서는 안녕, 잘 가 따위의 진부한 인사는 하지 않는다. 





오늘은 작정하고 1일 차는 마무리하고자 했는데, 횡설수설해다 또 끝났다. 이러다 박경리의 토지 버금가는 글을 적는 건. 정신줄 놓은 이유는 어머니가 갑작스레 입원을 했다. 아버지와 잊을만하면 떠나는 산악회 모임을 갔다가 빗길에 경미한 사고가 났다.


아버지는 부상이 없어서 다음 배차로 돌아오셨고, 머리에 혹이 난 어머니는 강릉에서 각종 검사를 받고 친한 언니와 함께 택시비 34만 원을 지불하며 귀가하셨다. 여전히 집에 와서도 부모님의 각자도생 하셨다. 아버지는 입원을 거부하며 통원치료를 결정했고, 어머니는 통증을 호소하며 병원에 누워 계신다. 병원은 저녁을 일찍 줘서 배고프다며, 가끔 늦은 밤 병원에서 탈출을 시도해 편의점에서 보름달 빵과 우유를 먹으며 전화를 하시곤 한다.


우리 부모님은 매 순간 예상치도 못한 교훈을 준다. 부부가 일심동체는 아득히 먼 옛말. 싸울 일이 생기면, 의견이 안 맞다고 싸우지 말고, 언성 높여가며 우기지도 말고, 그냥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야겠다. 남들이 보기에 이기적인 삶 같지만 나는 안다. 서로에 대한 엄청난 존중에서 오는 태도임을. 뭐,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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