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듦에 힘듦을 더해가는 여정
순례자들은 원탁형 테이블에 모여 식사를 한다. 식전 빵과 렌틸콩 수프. 그리고 메인요리는 생선과 닭고기 중에 고를 수 있는데, 8명 중에 7명이 닭고기를 택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지만, 사람 생각하는 게 거기서 거기인가 보다. 꼬북이가 시킨 생선이 나왔는데, 비주얼이 가히 충격적이다. 마지막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오며 달콤하게 하루 마무리. 이 나라 음식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 걱정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것 같다.
사람 인연이란 게 참 무섭다. 처음에는 별로 대화도 없다가, 계속 길을 걸으며 마주치다 보니 내적 친밀감이 최고조에 달한다. 자주 보는 사람의 얼굴은 무의식적으로 호감도를 발생 시키는걸까? 익숙한 것이 호감도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엄청났다. 의문의 친근감이 드니, 또 이름 지어줘야지. 흑화 된 느낌의 분은 쎄보이니 제시Jessy언니, 체력이 바닥나서 하루가 다르게 노화하고 있는 분은 '저질이'가 좋겠다. 제시언니랑 저질이가 우리를 친근하게 느껴졌는지, 몰래 우리 둘의 사진을 찍어서 인생샷이라며 건네주곤 했다. 옆에 앉은 이탈리아 아줌마는 이 길이 끝나면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겠냐고 돌로미티 산맥을 담은 사진을 보여주셨다. 굳이 왜 산티아고 걷고 있을지 의문이 생기는 뷰다. 오늘 또 하나의 만나러 가야 하는 풍경이 추가됐다. 떠나고 싶은 곳들을 모아두면 무수히 펼쳐질 오늘이 살아볼 만한 날이 되기 때문에 한결 더 소중해진다. 우리나라도 궁금하다며 사진을 보여달라는데, 내 사진첩에는 먹을 것밖에 없어 민망스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침대에 걸터앉아 빨래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맞은편 오삼부부는 직접 찾아왔단다. 분명히 내 침대까지 배달해 준 데서 침대 번호까지 적고 왔는데. 불안한 마음에 냉큼 내려가서 찾아왔다. 내가 챙겨 온 세탁물에 하윤언니 양말 한 짝이 없다. 이 동네 세탁기도 양말을 야금야금 훔쳐 먹는 고약한 버릇이 있나 보다. 세탁 서비스 덕분에 간간히 인간의 탈을 쓰며 살아간다. 평소에는 이런 사소한 일들에 고마움을 느낀 적이 별로 없는데, 별것도 아닌 일들이 다 감사하다.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이층 침대에 머리를 찧었다. 아무튼 어딜 가나 백칠십센티미터에서 조금 부족한 내 키가 문제다. 정확히 측정하면 154.3cm 되려나. 아무튼 내가 체감하는 나의 키는 매우 크다.
든든하게 조식을 먹고 수비리로 출발. 보슬비 내리는 고요한 풀내음의 아침 냄새가 좋다. 비구름 사이로 스며든 햇살도 사랑하고. 정신없이 바삐 살다 보니, 잊고 살았던 애정하는 것에 대한 기억이 하나 둘 떠오른다. 오늘은 하루종일 촉촉한 기분으로 걸어야 할 것 같아, 레인커버를 챙겼지만 걷다 보니 쨍하게 해가 떴다. 어제는 해발 1,400m까지 올라왔다가 900m까지 내려와 이곳에 도착했는데, 오늘은 남은 900m도 내려가야 한다. 혹시라도 일정에 빠듯하여 한 구간을 건너뛸 생각이면 이 길은 넘겨도 좋을 것 같다. 울창한 숲과 돌 길 사이를 하염없이 내려가야 하는데, 끝이 안 보인다. 어제 오르막도 힘들었지만, 내리막은 어나더레벨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에게는 호카 오네오네 카하2가 있다는 것이다.
평소 물건에 대한 소유욕은 없는 편인데, 발은 몽뚱이의 축소판이라 무조건 편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큰맘 먹고 질렀다. 순례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욕심내는 브랜드인데, 2009년 프랑스에 설립. 현재 본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다. 우리나라에는 호카 매장이 전국에 5곳 밖에 없어서,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가서 착장 해보았다가 비싼 가격에 망설이다가 비브람 마크에 현혹되어 구매를 결정했다. 비브람은 밑창 브랜드인데 신발계의 에어쇼바다. 좋은 차는 노면으로부터 차의 충격을 흡수시키는 에어쇼바가 있다던데, 이 신발을 신고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걸으면 폭신폭신한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든다. 신자마자 혼연일체가 되어 내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느낌이랄까. 아, 이 글 신발광고 아닌데. 아무튼 돈 쓴 보람을 느꼈다.
길을 걷다 보면, 죽어라 내려가다 지쳐 길 위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힘내라는 말이 먼저 나오던데, 그들은 힘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다만 괜찮냐며 묻는다. 그리고 어김없이 들려오는 소리. 부엔 까미노. 즐겁고 좋은 길 되세요. 죽을힘을 다해 공부할 때, 엄마가 공부 좀 하라고 말하면 괜히 짜증을 내곤 했는데, 힘껏 애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동안 너무 쉽게 힘내!라고 이야기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미안해진다. 그저 힘들 때 함께 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손만 내밀어 주면 될 것을 너무 깊이 생각했나 보다.
길 가다 만난 달팽이를 만났다. 이 친구도 덩키 서비스를 이용하는 걸까. 등이 휑하다. 꼭 차림새가 가출 청소년? 아니면 전세사기를 당해서 집에서 쫓겨난 행색이다. 갑자기 퐁퐁이 언니가 달팽이를 나눔 하여, 내가 정성껏 길러 주먹만큼 커진 달팽이들이 떠오른다. 달팽이는 밤의 시간을 좋아해서, 방안을 어두컴컴하게 만들어 캔들만 켜두고 미지근한 물로 반신욕을 시키며, 계란껍데기도 부서서 먹이고 애지중지 길렀는데… 엄마는 너무 징그럽다며 내가 회사 간 뜸을타 방생시켰다. 이름이 라이 &이라. 당시 장꾸미가 남달랐던 나는 퐁퐁언니에게 장꾸(장난꾸러기) 혹은 또라이로 불렸는데, 나의 아이들에게도 내 이름을 물려주고 싶었다. 큰 애가 (또)라이, 작은 애는 거꾸로 해서 이라(또). 그때 당시에도 내 작명 센스는 라임이 죽였다.
수비리 마을 진입하는 입구에서 한 무리가 길목을 막고 불러 세운다. 삥 뜯는 노인네들 무리 같으니라고.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내리막길을 많이 걸은 날에는 햄스트링을 꼭 공들여 풀어줘야 한단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분이 스트레칭 비법을 전수해 줬다. 처음에는 어깨가 너무 올라갔다며, 90도 맞춰서 내려오라고 하더니 두 번째 시도만에 완벽해진 나의 자세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불러 세워서 스트레칭 가르치고 있는 게 너무 웃기다며 껄껄대며 마치 스트레칭 클리닉 같단다. 심상치 않은 이 아주머니. 오늘부터 클리닉 원장님으로 임명하기로 했다. 이탈리아 오빠가 지나가자, 그들은 또 영업하기 시작했고 나와는 달리 쿨한 그는 사양하며 지나쳤다. 갑작스레 지나가서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하윤언니 말로는 엄청난 미남이었다고 한다. 카미노 매직 기대해 본다.
생각보다 피레네 산맥도 넘을만했고, 힘듦과 힘듦이 더해져 가며 하루 9시간 걷는 행위를 하고 있지만, 다행히 걱정한 수준에 못 미친다. 앞으로 나의 잠재력을 무시하며 살아가지 말아야겠다. 그동안 현실적인 이유로 밀어오던 일들을 꼭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그중에는 선진국의 잘 닦여진 길과는 달리 험준하기로 유명한 안나푸르나 abc캠프가 있는데, 말을 꺼내기 무섭게 하윤언니는 답했다. 그건 다이소 언니가 가고 싶어 할 것 같은데??? 말인즉슨, 제발 거기만은 나랑 가겠다고 하지 말란 소리다.
요즘 회사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것들이 변했다. 아니 아직도 변해간다.
작가들은 우울감을 가지고 글을 쓴다지만, 애초에 나는 진중하기보다는 재미난 사람이길 바랐다.
그래서 요즘은 주로 퍽퍽한 스콘과 심심함을 가지고 복기하여 글을 적고 있는 중이다.
자극의 역치를 낮추기 위해서 심심함을 자주 만드려고 노력하는데, 사실 요즘 회사에서 혹사 당하는 중이라 심심할 틈이 없다. 더군다나 글을 적을 여력이 없어, 매주 연재하는 수요일이면 벼락치기하는 마음으로 쓴다. 최근 하늘에서 한 분이 뚝 떨어졌는데, 매번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정신병과도 같다며 매일같이 새로운 일을 산더미처럼 주신다. 그분의 전 직장에서 임원이 어떻게 경쟁사로 몇일만에 바로 입사를 할 수 있냐며 그를 고소했지만!!! 역시 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어!!!라고 좋아했던 순간이 무색하게, 법원은 개인의 직업 선택의 자유가 중요하다며 기각 판결을 내렸다. 그는 자분자분 어린아이 타이르듯 조련하여 돌발상황에 멋쩍어하는 요즘이다. (또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