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구석작가 Aisha Jul 03. 2024

현실 도피에 진심인 편

- 잘 짜여진 시나리오 같던 나의 삶 속 반전을 찾아서







부장님! 스페인 출장 오셨어요?




수비리 입구에서 우연히 최부장님을 만났다. 블랙 앤 화이트 컬러의 시크한 슈트를 착용하고 바닥에 닿을 정도로 블링블링한 목걸이로 한껏 힘을 줘서 멋짐 폭발이다. 맨발로 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도 화보같아. 하필 삼만 구천보를 걷고 와서 하루 중 가장 허름한 행색으로 마주하다니, 하마터면 신을 원망할 뻔했다. 부리부리한 아랍 두부상이었는데, 스페인에서 보니 유럽 강아지상이 따로 없다.


스페인 산골 강아지상의 최부장님 소개 (잔나비 최정훈)






순례길에서 숙소 예약은 주로 왓츠앱을 통해 주인과 직접 소통한다. 원래는 마을 입구에 잘디코 알베르게에 묵고 싶었지만 여전한 숙소 전쟁. 풀 부킹 사태를 맞았다. 주인장에게 몇 군데 주변 숙소를 추천받아서, 형편없는 침대에서 자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리아네 집을 예약했는데, 숙소에 들어선 순간 내가 순례자였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힘들었던 오늘 하루도 안녕.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침대에 걸터앉아서 퉁퉁 부은 새빨간 발을 내려다보는데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기어코 오늘도 쓸데없이 착실하게 걸은 것 같아서, 짠하다. 내 삶을 소중히 여기는 정도가 바지런히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은 머리로는 알겠는데 수년간 몹쓸 습관이 깊숙이 베었나보다. 남에게는 사려 깊은 사람이지만, 유독 나 자신에게는 관대하지 못해서 내 인생의 나는 항상 뒷전이다. 극에 달했던 시기는 사랑이라는 감정도 사치같이 느껴졌다. 지금은 연애 부랑자에서 연애 부르주아로 살아가고 있지만. 마구잡이식으로 흥청망청 떠난 해외에서 여행자의 빛을 흐멀흐멀 잃어갈 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구나. 물리적으로 먼 곳을 찾아 단순히 현실 도피형 인간이었다는 것을.






(이어서…)

생각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선명해져 가는데,

구내염 때문에 입술이 부었다. 과로도 한몫.

끝까지 쓸 용기가 나에게도 있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