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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구석작가 Aisha Jun 05. 2024

[산티아고] 남다른 행운력

- 이 길 위에서는 좋아하는 게 참 많아진다.







한가로이 풀이나 뜯는 팔자 좋은 양 떼의 토실토실한 뒤태를 바라보며, 끊임없는 오르막을 올랐다. 이 구간은 모두가 기를 쓰는 곳이다. 다리가 딴딴해지도록 기를 쓰는 곳. 탁 트인 시야 속에 담긴 드넓은 초원에는 유난히 구경거리가 많아, 그렁저렁 걸음만 하다. 2시간 반정도 지났을까? 산장이 보인다. 저기가 해발 792m 높이에 오리손 산장이구나. 오를수록 확연히 달라지는 풍광에 황홀스럽다. 이래서 사람들은 높은 곳을 향해 가나보다. 지구상에서 단 하나뿐일 프레임을  마음속 찬찬히 담아본다.




오리손 산장에서 하루 머물고 싶었지만, 이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만 머물 수 있다. 도대체 알베르게 예약 전쟁은 언제쯤 끝이 날까. 보이는 것과는 달리 열악한 곳이었다. 산 속이라 물이 부족해서 머무는 순례객들은 단 하나의 샤워토큰을 지급받는데, 심지어 180초 후에는 단수된단다. 산장 주인이 꽤나 야속한가 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 이쯤일까.


저 멀리 길게 늘어진 줄이 보인다. 생 장에서 순례자 사무실 줄에 혼쭐난 후로 눈앞에 보이는 줄은 무조건 서고 보는 몹쓸 버릇이 생겼다. 일단 줄 먼저 서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도 늦지 않다. 그리하여 밝혀진 이 줄은 순례객들에게 허용된 단 칸 화장실 줄이다. 이곳을 지나쳤다면, 첫날부터 길바닥에서 엉덩이를 까는 상황이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네댓 명의 사람들이 따라 서는 것을 보고 안도한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 줄이 길어질수록 자기 확신에 가득 차올랐다. 사람들은 으레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해서 무슨 이유가 됐든 옳은 선택이었다고 확신을 갖는 과정을 중시하는 것 같다. 좋든 나쁘든 말이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사람마다 표정이 어둡다. 휴지가 없는 듯 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뒷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흔쾌히 그녀들은 귀한 휴지를 나눠줬다. 성격뿐만 아니라 외모도 동글동글한 그녀들은 마치 은방울 자매 같다. 줄을 기다리며 자매님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문신을 한 자매님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물론 아이라인 문신이다.





관절염 때문에 두 달치 약을 가져오느라,
짐도 제대로 못 챙겨 왔어요.
근데 더는 늦추면 안 될 것 같아서…
아가씨는 젊은 나이에 참 잘 왔다. 잘 왔어.



별 말도 아닌데, 눈물이 차올랐다. 고개를 들면 흐를까, 살짝 웃었다. 사실은 작은 왜곡이다. 산티아고 허언증은 아니고. 당시는 무심코 지나갔을 대화들이 다시금 떠올려보면 은근한 울림을 준다. 감격에 눈물 흘린 적이 언제였더라. 노래가사로 대충 때우려고 하는데, 무리수다. 무슨 노래냐고?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어, 흐르지 못하게 또 살짝 웃어~~ 나는요!!!' 됐고, 이 정도면 아이유 잘못이 크다.




은방울 자매님들이 말하는 젊은의 나이는 몇 살일까? 아마 이번에도 타고난 나의 행운력이 발동한 것 같다. 본래 아파트 단지 내 마트도 기어코 시동을 거는 걷기 회피형 사람인데, 여기서 하루에 6~9시간을 걷고 있다니. 생각이 갑자기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꼬무를 찍는다.


어느 꼬리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20대 끝자락 기억의 편린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나에게는 우연한 계기로 친구가 된 아야 소피아에서 일하는 무슬림 친구가 있다. 그는 매주 금요일마다 모스크에서 알라신께 기도를 올렸는데, 농담반 진담반으로 친구에게 부탁을 한 적이 있다.


"내 종교가 너무 들쑥날쑥해서 신이 나를 신뢰하지 않을 것 같아. 날 위해 매주 금요일에 알라신께 대신 기도해 줘. 그럼 매주 토요일마다 로또를 살게."


친구는 단박에 거절하며 말했다.

 ─ 신은 결코 행운을 만들어 주지는 않아.








신은 행운을 만들어 주지 않아.



문득 떠오른 친구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행운력은 신이 점지한 능력인 줄 알았는데, 전지전능한 신도 행운은 만들어주지 않는다니. 어쩌면 운과 불운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허상일지 모른다.


얼마 전 빠니보틀과 노홍철이 떠난 베트남 여행기를 유튜브에서 본 적 있다. 오토바이 라이딩을 하다가 노홍철이 넘어져 얼굴에 큰 부상을 입고 피가 철철 흘렀다. 평소 럭키가이라더니. 불운의 기운이 짙은 상황에서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되려 돈 주고도 못 사는 값진 경험을 했다며, 다음번에 이런 일이 벌어지면 모두 카메라에 담아달라고 했다. 긍정 회로로 똘똘 뭉친 사고방식이 그의 행운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평소 남다른 행운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나도 아직 로또 당첨이 되지 않은 걸 보니, 비슷한 맥락인가 보다. 밝음에 집중할수록 밝음을 닮아 가고, 어둠에 집중할수록 어둠을 닮아 간다. 내 생각이 운과 불운을 좌지우지하다니... 기왕이면 삶을 운에 더 가까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 뭐, 어쩌겠는가.라는 평온한 마음으로.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유영하고 나니, 나는 자매님들한테 힘이 되어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걷다가 만나면 꼭 말해줘야겠다. 오늘이 자매님들 생애 가장 젊은 날이니, 충분히 젊으시다고. 늦지 않게 참 잘 오셨다고. 나답지 않겠지만, 오랜 생각의 매듭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반드시 변화가 찾아온다. 걷는 도중에 올 수도 있고, 길의 끝에서 마주할 수도 있고, 한참이 지난 후에 찾아올 수도 있다. 나는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과 마주한다. 길 위에서 마주한 나는 일상의 나보다 더 몽글몽글한 면모를 지니고, 더 호기심이 많고, 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가식적으로 느껴져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이 모든 변화가 산티아고 길의 부름을 받은 이유만 같아.




이 길 위에서는 좋아하는 게 많아진다.
걸을수록 행운이 깃드는 것 같아.






수요와 공급법칙에 충실한 오리손 산장 물가. 비싸도 먹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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