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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구석작가 Aisha May 26. 2024

[산티아고] 혼숙 알베르게 전쟁

- 헐벗은 무해함에 대하여

무심코 지나쳐버릴지 모를 골목 잔잔한 풍경들





아무런 계획 없이 발 길 닿는 대로
행복을 따라 걸어요.



가다가 지치면 쉬어 가고, 기운이 솟아나면 다시 걷고, 다시 또 지치면 알베르게에서 하루 묵어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꿈꿨다. 현실은 생각보다 녹록지가 않다. 첫날부터 몰려든 순례객들로 생 장은 떠들썩했다. 이게 글로만 접한 알베르게 전쟁이구나. 모든 알베르게 풀 부킹 사태에 사무실에도 더 이상 매트를 펼칠 수 없다며, 순례객들을 3km 인근의 숙소로 이동시켰다. 다행히 출국 일주일 전 숙소를 미리 예약해 둔 터라, 참전할 필요가 없어 행복하다.  


30번 알베르게. 체크인을 하고 배정받은 방으로 올라가니, 이미 창 측 침대는 먼저 온 순례객들의 차지다. 그래도 운 좋게 4인실! 더군다나 천장과 맞닿은 이층침대도 아니라니. 세상을 다 가진듯한 더없이 근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 쾌재를 부르긴 이르다. 누군가의 코골이로 밤새 괴롭거나, 정체불명의 언어로 잠꼬대 공격에 괴이한 밤을 지새울지 모른다. 이윽고 룸메이트가 등장했고, 엄습한 불안감이 무색할 만큼 멀쩡해 보였다. (발꼬랑내는 위법일지도 모른다는) 멋을 중시하는 이탈리아 젊은이와 양갈래로 머리를 땋은 내 또래 한국인이다. 안도감에 엄청난 졸음이 쏟아져서, 저녁 미사를 포기한 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후일담에 따르면, 초어스름 잠에 들어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침대인 줄 알았다고 한다. 


오후 6시에도 나를 다독이는 햇빛. 후광 난무하는 나라에서 첫날밤.





새벽 5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알베르게에 첫 기상은 한국인일 가능성이 높다기에, 내심 뒤처지는 기분이 들어 곧장 샤워실로 향했다. 세 칸의 세면대와 바로 뒤편에는 세 칸의 샤워부스가 있다. 잇따라 나온 하윤언니는 고양이 세수를 했다. 나가도 괜찮냐는 객쩍은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괜찮다고 답했다.


동행인이 나간 자리 너머에 훤칠한 파란 눈의 생명체가 딱 달라붙은 짙은 그레이 색상의 네모난 빤쭈만 걸친 채 서있다. 이래서 물어봤구나. 상황 파악 한다는 걸, 졸지에 대놓고 쳐다보고 있는 꼴이 됐다. 눈이 마주쳐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하이. 이 실쌈스러운 자가 훗날 조식을 함께할 단풍국 오빠다.


연이어 다른 중년의 남자가 가운데 세면대에 자리를 잡는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그를 향했다. 훌렁훌렁 상의 탈의하려던 그와 눈이 마주쳐 화들짝 놀라 허공에 손사래를 치며 경기를 일으켰다. 난감한 그는 다시 착의한 채, 벅벅 양치질을 하기 시작했다. 수전증이라고 변명하기에 너무 명확한 떨림인 것 같다… 관계를 회복하기에 이미 늦은 것 같아,  유난히 공기가 무겁게 느껴져 화장실을 잽싸게 나왔다. 아침부터 몸뚱이를 가리지 않는 사람들로 피레네 넘기도 전에 기 빨린다.






침실로 향하는데, 방에 불이 훤하다. 우리 방은 아니겠지?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룸메이트들의 남다른 청음력을 간과한 내 잘못인 것 같다. 슬금슬금 방으로 들어가 동태를 살핀다. 발칵 뒤집어 놓은 범인은 따로 있었다. 갈래 언니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겠다고 모두를 강제 기상 시킨 것. 신사적인 뽀모도르 오빠는 얕은 미소를 장착하고 멀뚱히 앉아 있다. 이 언니 참 눈치가 없다. 잃어버린 것 같다던 동키 서비스 택을 어디서 찾았는지, 가방에 어찌 달아야 하냐며 슬그머니 나에게 온다. 오지 마라, 제발. 비몽사몽 침대에 걸터앉은 뽀모도르 오빠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침이나 먹으러 갈래요? 나의 물음에 한사코 거절한다. 아무래도 우리가 한시라도 빨리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눈치다.



부지런한 단풍이 오빠와 숨은 하윤 찾기



아침식사는 먼저 일어난 사람이 주방에 불을 켜고, 각자가 필요한 먹이를 냉장고에서 꺼내는 방식이다. 바지런한 단풍이 오빠가 불을 밝혔고, 우리는 건너편 자리에 마주 앉았다. 캐나다에 한국인 유학생이 정말 많아서 한국 사우나 문화도 들어왔단다. 이윽고 노년의 한국인 부부와 갈래 언니가 들어왔다. 7학년을 졸업하고 8학년에 접어들었다는 노부부는 수차례 산티아고 길에 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해외살이 43년 차라 그런지 남다른 활력이 느껴진다. 유독 8학년 슨상님들이 우리 나이를 궁금해했다. 30대 임을 밝히니, 20대인 줄 알았다며 엄청 관리 잘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훗, 나의 동안 외모가 빛을 발하는군.’ 내적 비명을 지르며 흡족하던 찰나.



 같이 오신 분은 더 어리시죠?


뒤통수 후려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제정신을 차렸다. 하윤언니도 동양인 특유의 동안 외모를 지녔지만, 나보다 무려 7살이나 많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물음에 내린 결론은. 8학년 슨상님도 노안이라는 세월의 흔적은 피해 갈 수 없었나 보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얼핏 보면 한국으로 유학온 캐나다 학생의 홈스테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모든 것이 어우러져 우리들의 산티아고를
풍성하고 따뜻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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