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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구석작가 Aisha May 20. 2024

[산티아고] 조개껍데기 구걸은 처음이라 그래

- 며칠 뒤엔 괜찮아져.




휴대폰을 꺼내어 사각형 화면에 순간을 담으며 여유로운 척 눈인사를 건네지만, 솔직히 나는 길치다. 네비 선생님 없이는 부지중에 고가를 타고 남의 동네를 넘나드는 괴이한 버릇이 있다. 일행으로 오해받을 정도로 앞선 사람을 바짝 따라 걷는다. 저 멀리 중세시대 느낌이 물씬 나는 붉은 성벽이 보인다.


부푼 기대감으로 한 발짝씩. 성큼성큼.

잉? 이 문이 아닌가? 문을 잘못 든 게 분명하다.

내가 알던 중세 느낌은 온데간데없다.



여기가 시간이 멈춘 마을이 맞나요?


도대체 어느 시대에서 멈춘 걸까. 하마터면 큼지막한 T는 주저앉아 울뻔했다. 실의도 잠시, 감탄을 자아낼 만 풍경이 한 폭의 그림같이 다가온다. 남보다 늦은 감탄사를 연발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당시 도로는 하수도 공사 중으로 유실돼 있었다. 마을 초입엔 공사 차량이 뾰족한 첨탑과 아기자기한 마을을 삼켰다. 한 걸음씩 나아가니 나지막이 선 옛 건물들이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분주하게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도 행렬에 끼여 작은 골목을 따라 오른다.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높은 곳에 사무실이 있을거라는 표기


<Pilgrims office> 사진에서만 보던 순례자 사무실에 도착. 언텍트 시대에 산물인 앱 오더로 주문하는 일이 익숙한 나는 기다림이 싫다. 여권 발급 줄을 가뿐히 제치고 예약한 알베르게로 향했다. 왜 항상 후회는 늦을까. 알베르게 체크인은 오후 4시 이후로 순례자 여권을 필수 지참해야 한단다. 배는 부르지만 입이 고픈 느낌이 든다. 마음속 허기를 달래줄 먹이를 찾아 성문 밖 까르푸로 향한다.  


생존을 위한 꼭 챙기라는 아무개의 조언에 따라 에너지바를 고른다. 동물 사료 같다는 평을 익히 들어서 별 기대는 안 한다. 재고가 달랑 하나 남은 초콜릿바를 택한다. 나중에 한 입 베어 물고는 국경을 초월한 나의 돼지력에 감탄했다. 맛있다. 나의 인간사료 모음집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려고 했으나, 실패. 정신줄을 간신히 부여잡고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먹는 바람에 에너지바 이름이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뭐 하나 줄 서지 않고 되는 일이 없다. 방황 끝에 되돌아간 순례자 사무실. 줄이 서너 배는 길어졌다. 남들이 줄 서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객기 부리지 말고 눈치껏 줄 서길 바란다. 늦게 오면 땡볕에서 기다려야 한다. 한 시간반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들어온 사무실. 영어 자원봉사자는 단 둘 뿐이라 더 기다려한다. 스페인어 안내를 듣는 중년의 한국인 부부가 보인다. 마음은 함께이고 싶다. 이들이 훗날 등장할 오삼부부다.


(예고) 다음 날, 이층 침대 이웃이 된 오삼부부

"스페인어 잘하시던데요. 순례자 사무실에서 봤어요. 스페인어 설명 들으시는 거~ "

  ─   앉으래서 일단 앉았는데, 스페인어지 뭐야. 그냥 씨씨(Si Si, 알겠어) 거리니까, 도장 찍어주던데...


신박하다. 왜 나는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정말 늦은거다. 씨씨 거리는 오삼 부부





쾌활한 자원봉사자 Kessi 가 산티아고 길에 대한 설명과 순례자 여권 발급을 도와줬다. 뜬금없이 고백하건대, 나는 이름을 기억하는데 소질이 없다. 기억력 3초는 아니고 붕어도 아니다. 그냥 붕어싸만코다. 덕분에 작명에 능하다. 나보다 우월한 말재간을 가진 하윤언니는 순례자 여권 발급비를 현금으로 지불하라던 Kessi를 현금언니(Cash, 캐시)로 단박에 개명해서 나와 같은 종족임을 증명했다. 제법이다.



드디어 첫 세요(Sello)가 찍힌 순례자 여권을 거머 줬다.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도장과 조개껍데기에 막연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다. 이 둘을 위해서 순례길에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나에게 필요한 건 뭐? 조가비! 원래는 구석 한쪽 켠에 원하는 만큼 기부하고 조개껍데기를 고르면 되는데, 박스가 텅 비어있다. 다급히 현금언니에게 물었다. 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5월 1일에 900명의 순례객이 다녀간 후로 조가비는 동이 났단다. 테이블에 올려진 장식용 조가비를 가리키며, 간절한 눈빛으로 구걸했다. 내 눈빛이 통했냐고? 그럴 리가. 몇 차례 말해도 어렵단다. 자존심에 금이 가기 전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쿨하게 퇴장했다.  


왠지 언니의 설명 끝에 틀린 답을 골라야 할 것 같아. 리슨!





내일은 이번 여정에서 가장 난도 높은 피레네 산맥을 넘는 날이다. 육체적 한계에 도전할 생각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과연 10.1kg 짐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 들 무렵, 순례자 사무실 옆에 늘어선 줄이 보인다. 자본주의의 수혜를 놓치지 않으려는 자들의 몸부림이다. 외면하지 못하고 나도 합류해 본다. 이름하여, 동키 서비스. 당나귀는 아니겠지만, 나 대신 짐을 이고 가준다.  신청서를 작성하는 와중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뽀얀 조가비가 눈에 들어온다.


“언니, 저 조가비 좀….”

   ─  그거 내 거 아니야.

“어디 가면 조가비를 구할 수 있죠?”

  ─  다음 도시에서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이쯤 하면 됐다. 그만 질척거려야지.
순례자 사무실이 조개 무한 리필집이냐고.


동키 서비스의 세요는 귀여움을 한움큼 삼킨 것이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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