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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Jan 02. 2024

《종이의 집:베를린》사랑을 사랑한다.

"사랑은 결국 빛바래. 처음에만 빛나지". 드라마 주인공 베를린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 내게도 사랑은 빛 나는 순간에만 모든 것이 좋게 느껴진다.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사랑 노래들은 마치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 같고,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먹는 비싼 요리가 아니더라도 최고로 맛있는 음식이 되며, 상대가 하는 시시콜콜한 몇 마디 말에도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다 설렘이 끝나는 순간, 태초부터 세상에 존재한 것이 아닌 듯 모든 것이 사라지기도 한다.


베를린은 사랑의 가치를 낮추어 보며, 과업 중심의 삶에 몰두한다. 그는 유럽 왕가의 보석 63개를 훔치기 위해 특출 난 능력을 가진 범죄자를 모은다. 모인 동료들 간 사랑에 빠지려는 것을 포착한 그는 분별력 있게 거리를 두라고 조언하며 시작조차 하지 못하도록 피어나는 사랑을 막아선다. 실제 '로이'라는 인물은 베를린의 말로 인해 사랑의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한다.

ⓒ  Berlin of NETFLIX. All right reserved.

나도 베를린처럼 사랑보다는 일이 앞서는 사람이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사랑에 빠진 순간에는 상대방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종의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이 오면, 사랑은 우선순위가 아니게 된다. 단지 내가 지키고 책임져야 하는 몇 가지 중에 하나로 전락한다. 베를린이 빛과 같이 느꼈던 눈부심과 사라졌을 때의 허무함을 나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과학적으로도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다.


사랑을 하면 뇌에서 도파민을 분비한다. 사람에 따라 분비되는 기간이 다르겠지만 대략 2년 정도를 기점으로 분비량이 줄어든다. 연애를 하다 보면은 상대가 변했음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실제로 상대는 변하지 않았고, 변한 것은 오히려 나 일지도 모른다. 물론 연애 초에 상대는 자신의 단점들을 보지 못하도록 숨겼을 가능성도 있지만, 보이지 않던 단점들이 호르몬 분비가 줄어들면서 보였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베를린은 다시 사랑의 빛에 빠진다. 상대는 훔쳐야 할 보석을 관리하는 경매 회사 직원의 아내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 본인 일에 파국이 초래될 것을 알면서도, 마치 불에 뛰어드는 나방과 같이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베를린을 이렇게 묘사한다. "슈퍼에는 가지 않을 사람처럼 보여요. 전 세계를 여행하며 박물관을 다닐 사람처럼 보여요. 포도밭에서 와인 마시고요. 병맥주도 처음 마셔보는 걸 테고요".

ⓒ  Berlin of NETFLIX. All right reserved.

베를린은 답한다. "맞아요. 병째 마시는 거 혐오하죠. 상자에 담겨 창고와 트럭을 오가며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거쳐 내 입에 닿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맥주는 천상의 맛이네요". 그는 자신이 평소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일보다 사랑이 중요해지고, 샴페인보다 그녀와 마시는 병맥주를 좋아하고, 계획에 맞춰 턱시도를 입고 그녀와 공연을 보러 갔지만 계획과는 전혀 다르게 테킬라를 마시고 미친 듯 춤을 춘다. 계획으로 점철된 그가, 이제는 예상치 못함을 사랑한다. 다시 말해 그는 사랑으로 인해 변화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그런 사랑이 있었다. 나는 예측 가능한 것을 선호하며, 통제 불가능함에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는 무엇하나 예측되지 않았다. 지인과 술을 마셨던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 갔지만, 그녀는 맥주를 한 잔 하자며 다음날 출근인 나를 새벽 3시까지 붙잡아뒀다. 전화는 각자의 시간을 낭비할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루 6시간 이상 통화를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보면 만족했던 나지만, 그녀를 볼 수 있다면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팽개치고서라도 일주일에 몇 번이나 달려갔다. 일상이 무너졌지만, 일상을 무너뜨려준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다.


그녀에게 나는 허언증이 있는 사람이 돼버렸다. 그녀를 처음 만나서 설명했던 나에 대한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거짓말이 되었다. 이를테면 "나만의 개인 시간이 필요해. 전화를 붙들고 사는 것은 각자의 현재를 살지 못하게 해. 일주일에 한 번 얼굴 보는 정도면 충분하잖아."와 같은 말들이다. 거짓말하는 것을 지극히도 싫어하지만, 사랑에 빠지면서 내 말과 행동이 거짓말이 된다 해도 괜찮았다. 오히려 그녀를 사랑하며 이렇게나 내 모습이 변할 수 있다는 것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온전히 그녀를 사랑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녀와 만나면서 내 생각이나 고집 따위는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내 모습을 사랑했다. 눈을 뜨면서 제일 먼저 그녀를 떠올리고 잠들 때까지 그녀와 이야기하는, 이토록 진실되게 그녀만을 생각할 수 있는 내 모습을 사랑했다. 그녀라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준다 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느끼는 내 모습을 사랑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함과 동시에 그녀를 사랑하는 내 모습을, 그토록 고집이 세고 변하지 않으려고 하며 감정이 무딘 나조차 변할 수 있음을 사랑했다.

ⓒ  Chang Duong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사랑은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상대의 성격, 외모, 직업, 재력 등의 특성들은 내가 상대에게 호감을 가지도록 한다. 하지만 사랑의 모습 중에는 상대를 사랑하는 나 자신과의 관계 맺기도 존재한다. 굳건한 원칙이나 삶의 기준을 바꾸지 않는 내가 변할 수 있음을 느끼며 사랑을 확인했듯이, 사랑은 타자와의 관계뿐 아니라 나와의 관계도 다시금 정립한다. 이는 호르몬 분비 감소로 인한 사랑의 유통기한과 강도를 늘려줄 것이다. 나와 관계 맺기는 사랑을 빛이 바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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