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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Apr 26. 2024

사회복지사는 믹서기가 아니거든요.

'사회적 고립' 포럼에서 한 사회복지사는 고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거부하는 당사자를 사회와 연결되도록 했던 실천 사례를 말했다. 그녀는 우리 사회가 이상으로 떠올릴 법한 사회복지사다. 짧은 발표를 통해 본 것이 전부지만, 그녀가 평소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기에 시간은 충분한 듯했다. 밝은 에너지가 넘쳐 주변 사람마저도 힘을 갖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발표가 끝날 때쯤, 그녀를 향한 나의 박수는 공허할 수밖에 없었다.


사례가 좋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녀의 노력으로 거부하는 고립 가정 중장년 남성은 다시 사회와 연결됐다. 그럼에도 나는 마냥 찬사를 보내기가 어려웠다. 아마도 개인적 차원의 해결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녀가 아니라면, 거부하는 고립 가구 당사자를 사회와 연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녀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다면, 소진이 와서 복지관을 퇴사하고 다른 직업을 선택한다면, 좋은 성과로 승진해서 더 이상은 실천 현장이 아닌 관리직으로서 근무한다면 그 동네 어딘가에 있을 거부 고립 가구 당사자를 사회와 연결할 수 있을까.


그녀는 거부하는 고립 당사자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출근부터 야근까지 노력했다. 출근길에는 중장년 남성이 쌀을 술로 자주 바꿔가는 동네 슈퍼로 출근했고, 핸드폰도 안 하면서 한마디 말없이 먹는데만 집중하는 중장년 최애 맛집 국밥집이나 찌개집에서 점심을 먹었고, 야근으로는 호프집이나 복권 가게와 같이 중장년의 남성이 있을 법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기웃거리며 고립 당사자 생활에 밀착 접촉했다. 단지 중장년 남성을 이해하고, 간접적으로라도 만나기 위해서다.

ⓒ Atle Mo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워라밸이나 일가정 양립이 화두인 시대에 모든 사회복지사에게 이러한 실천을 강요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 아찔함이 앞선다. 낮에는 사회 안전망을 만들고 밤에는 사회 변화를 위해서 글쓰기를 이어가는 나지만, 그녀의 노력과 같은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럼에도 그녀는 우수한 실천 사례로 온/오프라인을 합치면 수 천명의 사회 서비스 종사자 앞에서 자신의 노력을 나눴다. 일개 사회복지사를 갈아 넣은 사례를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그녀의 노력이 헛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포럼을 들으면서 사회복지사는 결국 초인적 힘을 가진 슈퍼맨이 하는 일이구나.'라고 느꼈다. 그녀 덕분에 연결된 거부 고립 당사자는 이전 보다도 안전한 삶을 살아가겠지만, 그녀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기에 여전히 고립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면서 무책임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실천 사례 덕분에 이제는 답을 알 것 같지만 거부하는 고립 당사자를 연결하는 일은 여전히 쉬워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 '밥 아저씨'의 "참 쉽죠?"와 같다.

참 쉽죠?

물론 그녀도 연결을 시도하다가 고립 당사자에게 거부당했던 경험을 말하며 나름 인간적인 면모도 내비쳤다. 나도 코로나19 상황에 긴급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 등의 주민을 위해서 사회복지사가 직접 돌봄이 가능해야 한다고 설득하러 일 년을 다녔다. 코로나19 초기를 떠올려 보면, 감염 상황에 확진자와 접촉이 가능한 사람은 오직 방호장비를 착용한 의료인뿐이다. 만약 사회복지사가 방호장비를 착용해도 접촉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신종 감염 상황에서 여전히 변함없다.


그 숱한 거부 경험 끝에 나는 스트레스성 구내염을 1년 넘게 달고 살았다. 사회복지사지만 긴급 돌봄이 필요한 주민이 있음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과 돌봄 공백을 방치하고 있다는 '불안함', 내 간절함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사회 안전망을 단단히 하지 못한다는 '자기 비하'가 합쳐진 결과였다. 나는 하루 다섯 번 이상을 구내염 치료약을 혀에 바르고, 스테로이드 약을 반년 이상 먹었다. 대학병원 주치의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스트레스성이기 때문이다. 부딪히다 내가 부서졌고, 나는 끝내 변화를 포기했다. 프로젝트가 종료되자 거짓말처럼 구내염은 사라졌다.


나의 노력도 그녀의 노력과 마찬가지였다. 우리 주위에는 이처럼 자신을 갈아 넣는 사회 서비스 종사자가 있다. 감히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거부당하는 것은 사회 서비스 종사자에게 일상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사회복지사가 빛나지 않는 존재였으면 한다. 응당 빛나야 하는 것은 개인이라기보다 시스템, 사회복지 제도다. 사회복지에서는 '안전망'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그물망처럼 어떠한 배경이나 환경, 성격, 신체, 성향 등의 조건에도 걸러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비스가 기획부터 주민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촘촘해야 한다.

ⓒ Engin Akyurt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완벽한 시스템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헌법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꿔야 할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이나 개인의 노력이 환대받는 것은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노력은 시스템이 아니고,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그녀를 두고 했던 세 가지 가정은 '만약'이지만, 바꿔 말하면 충분하게 실현 가능한 현실이기도 하다.


개인을 갈아 넣지 않으므로 소진 없이 사회복지사가 오래 전문성을 이어갈 수 있기를, 개인이 시스템 그 자체로 기능하지 않도록 해서 지속가능하기를, 누구나 돌봄이 필요한 미래의 사회에서는 돌봄의 가치가 보다 인정받는 사회이기를 바란다. 사회복지 현장에 매뉴얼은 적합하지 않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불완전하고,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노력을 준거로 삼아 거부하는 고립 당사자와 소통하는 연구가 진행되었으면 한다. 그렇다면 보다 사회복지사의 일도 전문적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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