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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Jan 15. 2024

똥으로부터

시시콜콜한 이야기

이 글을 쓰고 있는 2024년 1월 15일 현재, 호주 멜버른에서는 테니스 4대 그랜드슬램 대회인 '호주오픈'이 열리고 있다. 어린 시절 가졌던 소원 중 하나가 4대 그랜드슬램 중 한 대회를 직접 가서 보고 즐기는 것인데, 해외에 살고 있는 가족 얼굴 보러 한 번 가기도 어려운 작금의 경향을 생각해보면 새삼 그 꿈이 얼마나 원대하고 요원한 것이었는지를 헤아리게 된다.


각설하고, 다시 테니스 이야기로 돌아오면 현재 여자 단식 1번 시드를 배정받은 폴란드의 세계랭킹 1위 '이가 시비옹테크'가 WTA1000 대회인 신시내티 오픈에서 상대에게 역전승을 거둔 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My coach told me months ago that after losing a set it might be a good idea to change outfits... I tried this time and it worked!"


그러니까 1세트를 상대에게 내준 뒤, 코치가 옷을 한 번 갈아입어 보라고 한 말을 떠올렸고 당시 이가 시비옹테크는 그게 뭔 개소리 인가(위의 문장에는 생략되었지만 그녀는 입 모양으로 Bullshit 이라고 했다)싶었다고 했지만 시키는 대로 해봤더니 정말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옷을 갈아 입는 것이 어떻게 선수의 경기력에 영향을 주는 것일까. 뭐, 여러가지 심리-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은 충분히 뒤따를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1세트를 6-3으로 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2,3세트는 6-1로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무튼 그녀의 코치는 참 영리한 사람이다.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고독한 스포츠인 테니스에서 마인드컨트롤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고, 특히나 스트레스에 취약한 자신의 관리 선수를 어떻게 다루는지도 알고 있던 지도자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점은 큰 대회에서 역전할 수 있었던 비법이 대단히 사소한 행위였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마치 예수님이 눈을 뜨라 했더니 앞을 볼 수 있게 된 소경처럼 - <분노의 주먹>을 통해 상기할 수 있는 요한복음 9장의 문장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아는 건 한 때는 소경이었지만 이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따나 "그 방법이 좋은 방법이었는지 Bullshit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아는 건 한 때는 지고 있던 경기를 뒤집어서 승리했다는 것 입니다." 와도 같이 - 너무나 간단한 몸짓 하나가 인체 본능을 일깨우고 우주의 변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운 것이다. 인간의 몸도 세포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세계를 지탱하고 작동시키고 순환케하는 그 모든 순리와 질서의 핵심 조각들은 먼지처럼 작고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학을 다닐 때, 어느 시점부터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학교 경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는 거대 자본이 유입된다는 뜻이고 이에 따라 학생들에게 유리한 점, 불리한 점이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돈이나 성장이라는 개념이 가진 향기에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기업이 학교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시행한 프로젝트가 그야말로 나를 감동케 했다. 그것은 바로 화장실 개혁이었다. 학내 화장실에 있는 많은 변기들을 비데로 바꾸는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할렐루야. 커버 없는 차가운 변기에 소중한 엉덩이살을 대야만 했던 날들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다소 뜬금 없는 맛이 있는 정책이다. 그러나 이는 테니스 선수에게 옷을 갈아 입어보라는 권유만큼이나 산뜻한 맛이 있었다. 많은 이들의 기분이 좋아졌고 대기업 자본이 학술 공간에 상주한다는 것에 다소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나조차 해당 기업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인간 육체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 문명 뒤에 숨은 근원적-야만적 경향성에 집중하고 그 편의를 위해 돈을 쓴다는 것은 숭고한 일이다. 대기업은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 제도는 못된 습성이 있다. 인간이 살아있는 동물이고 근원적-야만적 경향성이 언제나 살아 숨쉰다는 것을 잊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똥이나 오줌같은 것을 약간 터부시하기도 하고 유아적인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지극히 단편적으로 판단한 예시지만, 이를테면 사람이 목을 매 자살하는 수많은 묘사들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배설하고 일부 남성의 경우 발기하는지 등등은 굳이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크쥐쉬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은 그런 점에서 내게 경이로운 작품으로 남아있다.) 냄새나고 더럽고 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고 기품없는 느낌이다. 성욕-신체장애 처럼 선명한 인간본색의 명제들을 일부 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괴롭혀 왔는지를 생각해보라. (자본주의 사회의 국회의원이 동성애자는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SM클럽은 언제나 비밀스러운 곳이어야 하며, 심지어 어떤 나라는 휠체어를 탄 사람을 위해 비탈길을 설치하지도 않는다!)


이쯤 되면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는 똥과의 전쟁과 함께한다.' 같은 철지난 싸구려 일간지 사설 제목 같은 문장을 끄적여 봐도 무방한 것 같다. 마르세유 궁전의 똥 사태만 봐도 그들이 똥을 제대로 모시지 않아서 발생한 일이었다. 인간은 죽어도 먹고 싸는 존재이며 학생들도 똥을 싸야 공부를 잘할 수 있다. 마르셀 뒤샹이 마르지 않는 샘이라며 레디메이드 소변기를 턱 하니 전시장에 가져다 놓은 것이 미술사의 중요한 변혁 포인트이자 거대 권력집단에 대한 반항이자 아방가르드로 읽히는 것을 생각해보라. 이 혁명이 다른 물건도 아닌, 사람(남성)이 오줌을 싸는 도구였기 때문에 반향이 더욱 컸다는 점은 누구나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사람이 건강히 살게 되는 것은 원초적인 각종 문제에 대한 해소, 그 해방구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면밀한 고찰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가능하다. 물론 사안을 해결하는 방법이 객관화(혹은 존중과 배려)에 있지 않고 거대 권력집단의 주관화(혹은 차단과 은폐) 속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대개는 그렇지 않아 보이지만!) 그러나 아무튼 중요한 것은 누군가는 똥이나 오줌에 대해 이야기 해야한다는 것이고 인간이 얼마나 짐승인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며 그에 걸맞은 토픽들에 대해 적나라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자본주의 기반의 문명과 사회는 병들고 마르세유 궁전만큼이나 똥오줌 냄새로 가득한 공간이 되고 말 것이다. 소변기를 샘이라 칭함으로 인해 넓어진 미술-미학-문화적 저변과 너무나도 넓고 멀고 건강하게 연장된 예술의 생명력, 그로 인해 다채로워진 인간 생활을 생각해 보라. 우리 학교는 대기업이 들어와서 변기가 비데로 바뀌었어요! 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진지하게 자랑스러운 일인지 떠올려 보라. 다시, 이쯤 되면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는 똥과의 전쟁과 함께한다.' 같은 문장은 철지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충격적인 게시물을 보았다. 무려 똥 싸는 칸에 휴지가 없는, 정확히는 휴지가 사라진 화장실의 모습이 올라온 것이다. 이것이 조작된 것이 아니고 또 최근의 사진이 맞다면 이는 국가가 얼마나 망조의 단계로 진행하고 있는지 선명하게 진단할 수 있는 자료일 것이다. 화장실 휴지가 매달려 있던 그 자리에 '화장실 비품 예산 감축으로 인하여 변기 칸 내에서 휴지 사용이 불가하게 되었습니다. 휴지를 미리 챙기어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공사측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다! 다른 공간이면 몰라도 '대중'(교통)의 공간에 화장실 사용과 관련하여 개인의 책임(미리 챙기지 않으면 낭패고 휴지살 돈이 없다면 더더욱 낭패다!)이 부여되다니. 노동자가 출근해서 무리하게 일하는 것은 괜찮다고 하면서 공공장소 화장실의 휴지는 예산이 없어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 물론 지금 이 글은 적당히 유우머러스한 풍자적 맥락으로 쓰고 있기는 하지만,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나지 않는다. 이 나라의 자본주의-시스템의 맥락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강요 하면서 인간 근원의 문제나 원초적 생태 혹은 동물적 생리와 섭리 등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상태로 작동한다. 이러니 사람들이 불편하고 살기 힘들어하며 나 자신의 올바른 생존, 그러니까 '건강한 자존'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집에만 있고 혼자 있고 - 게다가 발달된 인터넷 세상을 통해 모든 것을 접하며 - 실제로 거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문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 없는 채로 생활을 영위하게 되며 당연히 인간 존재의 맥락과 동물적 특질에 대한 이해를 잃게 된다. 지금도 공공의 화장실 안에는 사람이 있다. 변을 보고 그것을 처리한 휴지가 없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출산율이 왜 자꾸만 하락하냐고? 그 문제의 원인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


자본주의 사회는, 그 사회를 자본을 소유한 단계에 따라 계층화 한다면 명백한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 있다. 피라미드는 저변이 탄탄하고 넓어야 많이 높게 쌓을 수 있다. 그 저변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고 대개는 먹고 살기 위해 제 몸과 정신을 팔아야 하는 노동자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도, 길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도, 물건을 파는 사람도 다 그 저변에 있다. 저변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피라미드가 잘 쌓이는 법인데 그 사람들이 잘 살아보기 위해 출근을 하다가 급똥을 만나 바쁘게 방문한 변기 칸에 똥을 닦을 휴지가 없다면? 그야말로 통탄할 일인 것이다. 살 수가 없다.


농담조로 이야기 했지만 이 나라는 피라미드의 저변을 구성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정책을 수행하지 않으면 출산율 하락은 막을 방법이 없다. 벌써 피라미드는 역삼각형 모양이 되어있다. 그런 도형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 자리를 외국인들로 채운다고? 똑같은 환경에 저임금을 받고 고생할 또 다른 부품을 찾는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실질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건 사람이면 누구나 똥을 싸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식민지배를 당했던 아픔이 있고, 전쟁을 경험했던 상처가 있는 나라다. 그런 나라가 재건하기 위해서는 객관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패권을 손에 쥔 몇몇 몰지각한 인사들이 나라를 이끌면서 노동자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가려버렸다. 경제가 성장하면 모두가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었고, 내가 열심히 일하면 그게 진짜 경제를 성장시키는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나와 이웃이 모두 잘 사는 상태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속이고 함구했다. 그리고 이젠 사람들이 그 고도의 경제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놓여 있던 진실을 체감하고 있다. 이 나라는 OECD 회원국(42개국 기준) 가운데 자살율 1위(2018~2020년 기준, OECD집계)이며 출산율은 세계에서 가장 낮다. 그리고 이 두 반비례 곡선은 갈수록 서로가 멀어질 것이다. 이것이 이 나라의 현주소다. 왜 이렇게 전세계에서 이토록 유별난 국가가 되었을까?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급속도로 성장한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동안 급속도로 성장해서 물론 좋은 점도 많다. 지금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선대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또한 숭고하다. 그러나 라인강의 기적을 경험한 국가와는 달리 이 나라는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인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따라서 노동자는 일해야 마땅하며 깨끗하고 맑고 아름답고 모두가 잘살고 첨단을 달려야 하는 모습만 노출될 수 있었으며 똥 따위야 손으로 닦든 영수증으로 닦든 신경쓰지 않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제 공공장소에서 어떻게 똥을 싸야하는지,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 그런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국가의 국민들은 더 이상 번식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존에 대한 인식 자체가 사라진 나라에서 어찌 남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서두에 이야기했던 테니스 선수 이가 시비옹테크의 일화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녀가 코치의 조언을 'Bullshit'이라고 생각했을 지언정 그 조언을 실천에 옮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실제로 옷을 갈아 입었고 그렇게 상대 선수를 제압할 수 있었다.


이런 온라인 게시판에 사태를 진단하고 주절주절 불만을 떠드는 일은 쉽다. 잘난 감투 하나 없는 일개 시민인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이미 더 심화된 무수한 개념과 의견들이 전문가들 사이에 오고 갔다는 의미다. 진짜 문제는 이 사안을 의미있게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는 플레이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익명을 무기로 악플 다는 사람들은 늘어가고 분노조절장애와 우울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늘어나 정신건강의학과 손님은 늘고 아이는 낳지 않으며 소아과는 사라지고 노키즈존은 많아지는 뭔가 요상한 사회가 되는 것 아닐까.


독재 정권 아래에서 급속도로 빠르게 이루어진 -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 사회는 좋은 점 만큼이나 안 좋은 점, 병든 점이 존재한다. 이제 그 부작용을 치료해야 할 때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늦은 오후면 퇴근하고 가족을 만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웃을 수 있고 교류할 수 있고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스트레스를 해소할 거리가 있고 노동을 하는 가치가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 먹을 수 있고 먹고 나면 쌀 수 있고, 싸기 위해 따뜻한 변기에 앉아 닦을 휴지가 있음에 안심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을 바랄 뿐이다.


물론 기적과도 같은 변혁이 찾아오지 않는 한 이런 바람은 그냥 바람으로 남게 될 것이다. 메이저는 마이너에 기생하는 법이다. 저변이 있어야 하늘도 있다. 역설적으로 비약하자면 부자는 가난한 자에, 몸이 불편하지 않은 자는 불편한 자에게, 이성애자는 동성애자에게, 불로소득자는 노동자에게 기생하는 셈이다. 그 공생의 정신이 5%만 발휘되었어도 출산율 저하 곡선은 지금보다 완만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인구가 확 줄어들어도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도피적 상상도 해본다. 수시간을 달려야 민가 몇 채를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나라들이 많지 않은가. 사람보다 사람없는 산과 들판이 많고 제조하는 사람도 유통하는 사람도 소비하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지만 선진국 대열에서 힘차게 나아가고 있는 나라들도 있지 않은가. 인간은 줄고 다람쥐와 고라니가 많아지는 그런 유토피아를 한 번쯤 상상해봐도 누가 혼내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커피 한 잔을 하며 긴 글을 쓰다보니 요의와 변의가 몰려온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스타벅스에 화장실이 있음에, 비누가 있음에, 똥을 싸고 닦을 수 있는 휴지가 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가만히 많은 것들을 그리워한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에 나오는 것처럼 나의 자존과 이웃의 존재를 인식하던 사람들이 모여 삶의 희노애락를 몸소 겪어내던 그 순수의 순간들을. 소변기를 갖다 놓고 작품이라 우기던 마르셀 뒤샹의 용기를. 카메라를 들고 파리를 누비며 이것이 새로운 영화라고 주장한 고다르의 패기를. 그 옛날부터 사람이 사람 답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던 강경애 작가의 눈썰미를. 2024년에도 <사랑은 낙엽을 타고> 같은 작품을 만들며 작지만 큰 울림을 주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마음씨를. 그런 것 들을.


이런 의미없는 글을 너무 오래 앉아서 쓰고 있었다. 똥이나 싸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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