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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Mar 15. 2022

파레이돌리아_09

단편소설

깊은 반지하에서는 7년을 살았다. 수능 시험을 보고 성인이 될 때까지의 시간이었고 내내 권태롭고 지긋지긋한 시절이었다. 목회를 그만두신 뒤 부모님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하셔야 했는데 중장년이 새로이 뛰어들 수 있는 노동의 현장들이 대개 그렇듯 환경이 썩 좋지 않았다. 육신은 고되고 수입은 변변찮은 상황만이 반복되었다. 아버지는 점점 사라진 교회 첨탑의 자리에 나를 대신 세워두시는 듯 보였다. 아들이 집안을 일으킬 대들보이자 기둥이었고 우리 가정을 지하에서 꺼내 햇빛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줄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새롭게 시작한 일들에 적응을 하지 못해 몇 개월 마다 퇴사를 반복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사회 생활에 능숙하셨으며 고된 육체노동과 부족한 수면을 감내하셨다. 일 년이 되지 않아 직장에서의 승급이 이루어졌고, 그 월급으로 세 식구가 월세를 내고 겨우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다.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학교 급식 메뉴로 어떤 반찬이 나왔는지 궁금해 하시다가 본인이 점심 때 드신 음식과 반찬을 세세하게 이야기 하시는 대화 레퍼토리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강박적으로 반복하셨다. 남자가 어떻게 집 안을 책임지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기둥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매일 말씀하셨는데,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 안을 지키면 기둥이 되는 건가 하는 객쩍은 생각만 들 뿐이었다. 학년이 올라갈 수록 집 밖을 배회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물론 공부에는 소질이 없고 별다른 특기도 흥미로운 분야도 없는 청소년이 밤거리를 돌아다닌다고 저절로 숨통이 트이는 것은 아니었다. 문득 정근이를 생각하며 오락실이나 PC방에 가는 게 소일거리의 전부였다. 남녀가 비빈다고 했던 그의 말이나 길고 까무잡잡했던 허벅지, 복근이 선명했던 배와 미끈한 옆구리, 하루종일이라도 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체취도 잊을만 하면 다시 떠올라 머리를 어지럽혔다. 결국 밤을 떠돌았던 그 많은 시간 동안 배꼽의 냄새를 맡거나 사타구니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거나 홀딱 벗은 채 몸을 비벼대도 도망가지 않을 여러 남자들을 만났고, 머지 않아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학교 성적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볼품 없이 곤두박질 쳤다. 결국 재수를 하여 경기도 권에 있는 유명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이름없지도 않은 애매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재수 생활이 시작된 시험 이후로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일이 없었다. 집 안은 아주 조용했고 웃음소리나 노래소리 따위 들리는 일도 잘 없었다. 삭막한 거실에는 무릎이 아파 찜질을 하며 누워 계시는 어머니와 하릴 없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TV뉴스를 보며 험한 말을 뱉어대는 아버지가 계셨다. 아무도 이렇게 살 게 될 것으로 믿지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을 모양새였다. 7년 만에 지하를 벗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집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구옥 빌라 중 한 세대로 방이 두 개에 곱등이를 비롯한 각종 벌레들이 출몰하는 집이었다. 산사태라도 일어나면 바로 묻혀버릴 만큼 산과 가까운 것이 그토록 벌레가 많은 이유일 것이다. 이 집에 살게 된 이후로 아버지는 내게 집 안의 기둥이나 대들보, 책임과 희생을 맡을 아들 같은 말을 꺼내지 않으셨고 서로 먼저 눈을 마주치는 일도 없게 되었다. 



재수를 해서 진학한 대학에서는 문헌정보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적성과 잘 맞지 않았고 졸업 후 경찰 공무원 시험에 2년 동안 매진해봤으나 불합격하였고, 생계를 위해 일하던 카페 겸 베이커리 가게에서 알고 지내던 형님이 공인중개소를 막 차리셨는데 보조원으로 일할 생각이 없냐고 하셔서 두 말 않고 형님을 따라 나섰다. 한동안 필요한 작업들과 법률, 서류 작성 요령 따위를 배우고 동네를 익힌 다음 블로그를 시작하며 부동산을 알리는 일들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경쓰기 귀찮은 세세한 일들이나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내 몫으로 돌아왔고 큰 계약이나 생색낼 만한 일은 형님 앞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일주일에 6일을 출근하는 나와 달리 형님은 4일 정도를 출근하며 남은 시간 동안 골프를 배우러 다니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별로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깔끔한 옷을 입고 출근해 명패가 붙어있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쉬운 시절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독립할 자금이 쉬이 모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어제 아침에는 사무실로 이상한 전화가 걸려왔다. 나인빌 809호 문을 좀 열어달라는 부탁 전화였다. 나인빌은 공인중개사 사무소 근처에 있는 23층 짜리 오피스텔 건물로 내가 입주 시킨 사람들만 해도 수십명이나 되는 친숙한 건물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나인빌 809호에 살고 있는 20대 남성의 직장 동료 인데 아직까지 회사에 출근을 하지 않았고 연락도 받지 않아 집 내부를 확인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동료에 따르면 809호의 남자가 최근 안 좋은일이 있어 유난히 힘들어했고 직장에서 업무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만큼 우울한 모습을 보였기에 걱정이 된다고 덧붙였다. 꽤나 곤혹스러운 부탁이었다. 오늘도 형님이 골프를 치러 가셔서 혼자 일해야 하는 날이었다.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경찰관 두 명과 소방대원의 입회 하에 809호로 향했다. 직장 동료도 함께였다.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809호의 남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고민 끝에 경찰은 집 안으로의 진입을 결정했고 소방대원이 도어락을 분해해 현관문을 열어 젖히게 되었다. 집 안은 정리가 되지 않아 지저분했는데, 809호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과 지갑이 각각 침대와 싱크대 선반에서 발견되었지만 그는 없었다. 8평 짜리 1.5룸의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때 내 눈에 창 가에 달린 작은 쪽창이 반쯤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설마 하는 생각에 창가로 다가갔고 쪽창 밖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저 아래 까마득한 1층 지상에 신체가 뒤틀린 채 화단 깊숙한 곳에 떨어져 있는 809호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 어린 시절 강보의 귀신이 나를 돌아보던, 그 애매한 고개의 각도가 연상되어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다. 경찰에 의하면 1층에 사는 누군가가 새벽에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떨어졌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1층 입주자가 다시 잠에 골아 떯어졌고, 이후 내 눈에 발견될 때까지 사람들은 화단을 장식한 키가 크고 아름다운 꽃나무 사이로 떨어진 809호 남자를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어제는 결국 술을 많이 마신 채 늦게 귀가했다. 아버지는 사내 녀석이 결혼도 하지 않고 남의 뒤치다꺼리 하면서 사는데 술까지 퍼마신다며 내가 부끄럽다고 하셨다. 말리는 어머니를 있는 힘껏 뿌리치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또 높이는 아버지 앞에서 나는 손에 잡히는 물건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내가 던진 것은 싸구려 버터 과자가 들어있는 철제 박스의 뚜껑이었다.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바닥에 부딪힌 뚜껑이 흉측하게 뒤틀려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제서야 잔소리를 멈추셨다. 그 날 나는 교회 첨탑에서 추락해 떨어지는 꿈을 오랜만에 다시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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