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팔 끓는 물에 국수면 삶고 찬물에 살짝 헹궈서 보리 물을 부어 엄마가 만들어 놓은 양념장을 넣어 드린다.
내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만들어 드린 요리. 바로 국수다. 멸치 넣고 다시마 해물 등을 넣고 진하게 우린 육수가 아니라 보리 물을 넣은 이상한 국수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하시는 걸 어깨너머로 배워해 드린 국수이다. 육수 만드는 방법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때 당시 집에서 보리차를 끓여 먹었는데 노르스름한 물이 육수처럼 보였던 나는 그걸 데워서 부어드렸던 기억이 난다. 물론 아버지는 ‘맛있다’를 연발하시며 드셨지만 그게 뭐가 맛이 있었겠는가! 조금 한 손으로 오밀조밀 만들어낸 국수 한 그릇에 딸의 마음을 보신 것 같다. 난 잔치국수만 보면 아버지가 생각이 난다. 지금은 해물 진하게 우린 육수 가득 넣고 호박도 볶아서 넣고 더 맛있게 끓여드릴 수 있는데 드릴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
아버지 살아생전 착한 딸은 아니었다. 애교 많고 살가운 딸도 아니었다. 아니 처음에는 착한 딸이기도 했고 적당히 애교도 있는 딸이었는데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버지의 오랜 투병으로 애교도 착한 마음도 점점 사라졌던 것 같다. 집에 아픈 사람이 있다는 건 굉장히 우울하고 힘든 일이다. 마음 한쪽이 늘 무거운 느낌이 들고 무엇을 해도 마냥 즐겁지가 않다. 20대 초반 철없고 친구들과 놀고 싶은 나이인데 시간이 될 때마다 점심 저녁 아버지 식사를 차려드리러 놀다가도 들어오곤 했다. 엄마가 일을 하셨기 때문에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을 나도 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우리 모두 지쳐갔다. 그러면서 나의 애교도 착한 딸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랬던 20대의 내가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에게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아쉬움과 미안한 마음이 든다. 못된 생각일지 모르지만 돌아가시고 한동안은 사실 편했다. 끼니때마다 마음 무거워하지 않아도 되고 늘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지 않아도 되니까. 세월이 흐르고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 순간순간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 자리가 더 커지고 그리워질 것 같다. 아버지는 당신의 삶이 길지 않다는 걸 아셨던 것일까? 54년이라는 짧은 평생 참 많은 일을 하고 가셨다. 어린 나이에 장남이라 동생들 학비며 집안 생활비를 벌고자 안 해본 일이 없으셨고 베트남 전쟁에 참여도 하셨다. 평생 변변한 양복 한 벌 없으신 게 내내 맘에 걸려서 20살 때 아르바이트해서 받은 돈으로 개량한복도 한 벌 해드렸던 기억이 난다. 제주 여행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걸 해드리지 못했다. 그때는 사는 게 너무 바쁘셨던 것 같다. 남자 나이 4~50대면 한창 일하실 나이 아닌가!
아버지는 총각 시절엔 동생들 뒷바라지하고 결혼하고는 가장으로 쉴 새 없이 달려오시느라 여행의 여유조차 없으셨던 것 같다. 그러다 병이 생기고 투병 생활까지...
아버지의 삶을 생각하면 참 안쓰럽고 맘이 아린다.
아버지는 자주 나에게 드시고 싶은 음식을 말씀하시곤 하셨다.
‘딸, 아빠 국수 좀...’
‘아빠. 등산 가능한데 주먹밥 좀 싸줘. 지난번 만든 쿠키도...’
그때는 귀찮기도 해서 볼멘소리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라도 해드릴 수 있었던 게 다행스럽고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부터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이것저것 만들면 아버지께서는 나의 실패작도 맛있게 드셔주셨던 기억이 난다.
세상에 이렇게 무조건적인 내 편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런 아버지가 그리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