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가른 사자와 쥐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우리 집 아홉 살 집착남은 약 2주에 걸쳐 학교 네 곳의 입학시험을 보기로 했다.
호주국제학교의 시험은 화상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됐다.
면접관은 뜻밖에도 교장선생님이었다.
조회 시간, 높은 단상 위에서 뵙던 높은 분의 등장에 괜히 긴장이 더해졌다.
방문이 닫히는 순간, 시작되는 시험.
비장한 눈빛의 아이를 뒤로하고 우리 부부는 “I can do it.”을 외치며 방을 나섰다.
그렇게 문이 닫히던 찰나, 질문이 들려왔다.
”What’s your name?“(이름을 말해줄래?)_ 교장선생님
이 정도는 수십 번도 더 연습한 질문이다.
집착남은 즉시 우렁차게 대답했다.
“I am nine years old?!”(저는 아홉 살입니다.)
음?! 이름은 어디 가고 왠 아홉 살?
맙소사. 녀석이 너무 긴장해 버렸다.
가장 희망을 품었던 학교의 첫 질문부터 폭싹 망했수다, 라는 불길한 예감을 뒤로하고 문이 닫혔다.
우리 부부는 결혼 첫날밤을 엿보는 풍속화 속 인물처럼 방문에 달라붙었다.
면접 내내 교장선생님은 아이를 격려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엉뚱한 대답을 할 땐 천천히 몇 번이고 또박또박 다시 질문을 해주셨다.
결과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다.
십여 분이 한 시간 같이 느껴지던 시험이 끝나고.
교장선생님은 인자한 얼굴로 아이가 영어를 잘한다며 칭찬해 주셨지만 우리는 믿지 못했다.
이윽고 이어진 선생님의 말씀은 충격적이었다.
ㄹㄹㄹㄹㄹㄹㄹ~~Really???
아홉 살 영포자(영어포기자)는 단번에 해내고야 말았다.
이 정도로 오픈마인드라고?!
훗, 우리는 녀석이 해낼 거라고 믿었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의 희망회로가 격하게 가동되기 시작했다.
당일 합격 통보에 힘입어 아이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가장 입학 문턱이 높다는 BIS 필기시험은 장장 한 시간이 주어졌다.
그런데, 20분 만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선생님도 말릴 정도로 이례적인 시간이었지만 집착남의 표정은 무척 개운했다.
“천천히 풀어도 되는데, 한 번 더 살펴볼래?
시간이 많이 남았단다. “ _BIS 선생님
“아니에요. 괜찮은데요.”_아홉 살 집착남
모든 시험을 마치고 선생님은 부모를 호출했다.
입학 후 제2 외국어 선택에 대해 묻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걱정과 달리 아이가 매우 씩씩하다며 칭찬도 해주셨다.
화면이 꺼진 뒤, 남편의 설레발이 시작됐다.
아무래도 합격한 듯하다는 것.
합격을 전제로 선택과목을 물어본 게 아니냐는 논리였다.
문득 필기시험이 떠올랐다.
아홉 살 집착남은 순식간에 답을 찍었다고 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천천히 풀어도 된다고 만류하셨다고 한다.
‘문제가 쉬워서 빨리 풀었다고 오해한 건가?’
실제 한국 친구들 중에는 문제를 빨리 푸는 아이들도 제법 있단다.
컴퓨터로 답을 체크하기 때문에 찍었는지, 풀었는지 어찌 알겠는가.
전후맥락을 살펴볼수록 오해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러나 이미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켠 부자는 행복에 한껏 취했다.
혹여 말이 씨가 될까, 불길한 예감은 잠시 묻어두기로 했다.
결과가 날아올 때까지 부자는 쭉 행복할 테니.
그거면 되었다.
이번에도 집착남은 예정된 시험보다 필기시험을 빨리 마쳤다.
잠시 주어진 휴식시간.
2차 면접을 앞두고 선생님은 남편을 호출했다.
“면접은 따로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_EIS 관계자
“설마 합격인가요?” _집착남 아빠
“조금 더 영어 실력을 키운 후 다시 시험을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저희도 너무 아쉬워요. “ _EIS 관계자
당장 불합격!!!
필기시험 점수가 합격 기준에 못 미쳐 면접을 볼 기회도 사라졌다.
테니스 학교 대표선수의 꿈도 훨훨 날아갔다.
특이하게도 이슈믹은 면접이 먼저였다.
이 날을 위해 우리는 온갖 맘카페를 뒤져 나름 면접 기출문제도 구해 연습했다.
간단한 인터뷰와 그림을 보고 아이가 영어로 설명하는 시험.
그런데, 방문 틈새로 보인 화면 속에 어렵게 구한 기출문제가 떡 하니 등장한 것이 아닌가.
*문제와 비슷하게 재구성한 그림입니다.
‘The lion ate the mouse.’
(사자가 쥐를 먹어요.)
아이는 이 짧은 문장을 달달 외웠더랬다.
아홉 살 집착남은 주저하지 않고 외쳤다.
“The mouse play in the lion’s mouth.”
(쥐가 사자 입에서 놀고 있어요.)
약속이 다르지 않느냐, 약속이!!!
물론 쥐가 놀고 있으나, 잡아 먹혀도 사자 입에 들어 있는 건 매 한 가지였지만 뜻은 전혀 달랐다.
불길하게도 면접관은 아이가 원하면 필기시험은 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번엔 필기시험 자격이 박탈된 건가 싶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아홉 살 집착남은 특훈을 받지 않았던가.
시험을 준비하는 석 달 동안 녀석은 그야말로 ‘I can do it!’ 정신의 완성체로 거듭났다.
“I can do it.”
그렇게 진행된 필기시험.
사자(Lion)를 ‘Line’으로 쓴 것을 시작으로 줄줄이 오답 행진이 이어졌다.
집착남은 쥐(Mouse) 딱 한 문제를 맞혔다.
아이가 쓴 답안을 사진으로 찍어 이메일로 보내자 면접관은 답신에서 이렇게 한 줄을 남겼다.
‘Got it. Thank you…’ (수령 확인. 감사…)
흡사 ‘확인 쩝…’ 찜찜한 뉘앙스로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인가.
서양사람이 말 줄임표를 자주 쓰는지에 대해 남편과 토론을 벌이며 2주간의 입학시험 대장정은 막을 내렸다.
보름 뒤, 당일 결과를 발표한 두 곳을 제하고 나머지 두 학교의 결과가 도착했다.
이슈믹(미국식 국제학교)은 합격!
영국식 국제학교는 불합격…
어학원 원장님은 아이의 면접 당시 답변에 주목했다.
쥐가 사자 입에서 놀고 있다는 대답이 오히려 아이의 창의력을 돋보이게 했다는 것.
또 필기시험 포기를 권유한 것 자체가 또 다른 시험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주저 않고 ‘I can do it’을 외친 아이의 용기와 도전정신을 높게 샀다는 것이다.
애초에 사자와 쥐 그림에 정답은 없었다.
당시엔 망했다고 생각했지만 녀석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녀석을 어릴 때부터 정답과 오답이 있는 틀에 끼워 넣지 않은 우리도 틀리지 않았다.
해외주재원 발령을 받았을 때는 막막했지만 작은 용기가 생겨났다.
결국 우리는 집과의 거리, 자유분방한 분위기 등을 고려해 이슈믹을 선택했다.
이제는 ‘We can do it!’이다.
그리고 아이를 예쁘게 봐줘서 우리도
‘Thank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