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이 뭣이 중한디?!
학교로부터 두 번째 호출이 이어졌다.
‘바쁘신 건 알고 있지만 시간이 된다면 엄마도 함께 학교에…’
선생님들은 아홉 살 집착남만큼이나 철새 엄마의 귀환을 기다렸다.
당연히 나는 죄인모드를 장착하고 남편과 함께 부름에 응했다.
세 번째 비행에서도 베트남의 후끈한 공기보다 나를 먼저 반긴 건 한 통의 전자메일이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학교에 와서 이야기를 함께 나눴으면…’
학교에서의 세 번째 호출이었다.
돌이켜 보면 아이가 국제학교에 입학한 후 처음 6개월 간 나는 매달 학교에 불려 갔다.
기러기 엄마를 둔 학생이 전교에서 우리 아이 한 명뿐인가.
아니면 우리 아이가 극심한 문제아인가.
국제학교에도 학부모 면담이 있지만 보통 학기 초와 말미에 두 차례 이뤄진다.
그마저 학기말 면담은 아이가 주도적으로 자신이 이뤄낸 성과를 발표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매달 학교에 가야 했을까.
놀랍게도 6개월 간 여러 선생님들과 우리 부부가 만나야 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성적? 영어실력? 교우관계? 낙서?
모두 아니다.
바로 <아이의 행복>이었다.
“지금 당신의 아이는 행복하지 않아요.”
첫 면담 때 비수처럼 날아온 담임선생님의 한 마디는 6개월 내내 체한 것처럼 명치에 박혀있었다.
차라리 성적이나 영어실력으로 불려 갔다면,
버릇이 없다고 혼이 났다면,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열심히 집에서도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은 아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건 너무 어려웠다.
한 마디로 약속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당시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들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행요소를 하나씩 없애는 것도 불가능했다.
국제학교에 다니면서 영어를 안 쓰도록 할 수 있을까?
학교 수업을 따라가야 하는데 영어 과외를 중단해야 하나?
당장 기러기 생활을 그만두고 베트남에 오면 아이는 행복해질까?
면담 주제에서 영어 실력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물론 실력이 나아지면 학교에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으니 영어 역시 중요한 문제인 건 분명하지만
아이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영어공부는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 일환으로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수업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당분간 한국어 필기를 허락하기로 했단다.
영어를 증오하는 아이의 화부터 누그러뜨린다는 작전이었다.
덕분에 아이의 공책을 검수하며 선생님의 한국어 실력만 늘어나는 듯했다.
이 막막한 난제에 대해 토론할 때마다 우리 부부는 또 다른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반성도 했다.
선생님이 우리 아이의 행복을 고민할 동안
정작 부모인 우리는 이토록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던가.
아니 지금껏 살아오면서 ‘행복해지려고', ‘행복해지는 방법’을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얼마나 될까.
정답은 선생님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바쁜 우리가 시간을 쪼개서 모인 거라고.
이렇게 모인 것만으로도 아이는 조금씩 나아질 거라고.
비로소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성적보다 아이들의 행복이 중요한 학교.
미래의 행복을 위해 누구보다 바쁜 학창 시절을 보내는 한국의 아이들은 과연 행복한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쩌면 우리 가족은 영어보다 더 소중한 것을 찾기 위해 잠시 한국을 떠나왔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