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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 수의사 Mar 19. 2021

아내와 사랑새

아내와 동물원에서 생긴 일

아내를 처음 만난 건 서울의 어느 작은 서점 앞이었다. 전화번호만 건네받고 만날 장소에서 기다렸다. 아내는 약속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약속시간이 한 시간쯤 지났고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우두커니 기다리기도 그래서 서점에 들어가 책을 한 권 샀다. 다행히 책이 재미있어 한참을 읽고 있는데 아내가 나타났다. 아내는 아버지 친구 분이 억지로 소개해 준 사람을 만나기 싫어 일부러 제시간에 나오지 않았고, 혹시나 해서 지나는 길에 들른 것이었다. 아내는 미안해하면서도 약속된 시간보다 두 시간을 더 기다린 나를 신기해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아내를 보기 위해 일산에 자주 갔지만 쉬는 날에는 아내가 청주로 내려와 만나기도 했다. 아내를 만나고 있었던 그날, 동물원에는 먹이 주기 체험을 위해 새로 구입한 사랑새[budgerigar] 100여 마리를 야외 새장에 들여왔다.


 사랑새는 잉꼬새라고도 불리며 머리는 노란색이고 몸통은 녹색이다. 20cm 정도의 작은 몸 크기로 아이들 손바닥에 모이를 먹기 위해 모여들면 여러 마리가 앉을 수 있었다. 당시 동물 먹이 주기 체험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동물과의 교감이라는 명분으로 전국의 동물원에 많은 체험장이 지어졌다. 


아내와 청주 시내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가을비가 내려 거리가 젖고 있었다. 오늘 들여온 사랑새가 걱정되었다. 동물원에 오기 전에 사랑새들은 분명 관상 조류를 판매하는 실내시설에 지냈을 텐데 야외 새장에서 찬 가을비를 맞으면 모두 저체온으로 폐사할 수도 있었다.


아내를 차에 태우고 농업용 자재를 파는 가게를 찾아갔다. 거기서 비닐하우스에 씌우는 큰 비닐을 발견했다. 이 큰 비닐을 야외 새장의 지붕에 덮으면 사랑새들이 비는 안 맞겠다 싶었다. 큰 비닐을 접어 넣은 상자는 꽤나 무거웠다. 상자를 메고 동물원 정문에 도착하자 밤 10시였다. 동물원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랑새들은 횃대에 일렬로 앉아 처음 맞는 비를 어쩔 수 없이 감당하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비닐을 꺼내보니 가로길이가 10미터로 다 펼칠 수 없어 적당히 잘라냈다. 그러나 새장 지붕에 비닐을 씌우는데 문제가 있었다. 야외 새장은 높이가 7미터 정도로 지붕에 피뢰침이 솟아 있었고 지붕 전체가 망으로 되어 있어 사다리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 높은 새장 지붕에 비닐을 씌울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다. 불현듯 동물원 관리사무실 옆에 있는 대나무 숲이 생각났고 가장 키가 큰 대나무 두 그루를 톱으로 잘라냈다. 대나무 작대기를 비닐 앞쪽에 꽂고 연처럼 날려 새장을 덮으려는 계획이었다. 작대기 중 하나는 내가 들고 다른 하나를 아내가 들었다. 


대나무 작대기를 높이 들자 마침 거세진 비바람 속에 비닐이 날았다. 비닐로 새장을 덮으려 했지만 힘에 부친 아내는 번번이 대나무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계속 실패하였다. 입술이 파래진 아내는 빗속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몸은 비에 젖고, 자꾸 쓰러지는 대나무를 감당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렇게 한참 커다란 비닐과 실랑이를 하던 우리는 결국 새장 지붕을 다 덮지는 못하고 반쯤을 덮었다. 다음 날 사랑새들은 절반이 덮인 비닐 아래 모여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 며칠 후 다시 만난 아내의 손은 따뜻했고 우리는 말없이 오래 걸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랑새들은 그 후 10년 동안 동물원을 찾는 아이들의 먹이 주기 체험에 동원됐다. 아이들은 사랑새가 날아와 손바닥에 앉아 모이를 먹는 이 체험을 좋아했다. 하지만 사랑새가 그저 좋아서 다가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 먹이 주기 체험은 배고픈 사랑새가 손바닥의 먹이를 먹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는 용기로 가능했다. 더욱이 사랑새가 빨리 다가오기를 바라는 아이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선 사랑새들이 체험 전까지 굶어야 했다. 체험은 아이들이 주는 먹이로 배를 채우는 20분이면 끝이 났다. 동물의 긴 배고픔을 이용한 짧고 말초적인 즐거움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4년 전부터 우리 동물원은 사랑새 체험을 중단했다. 동물 복지 문제도 있었지만 새가 가지고 있는 인수공통 질병이 새들과 접촉하면서 아이들에게 전염될 가능성이 있어 이뤄진 조치였다. 얼마 전 담당 사육사가 사랑새장에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를 넣어줬다. 떨어진 나무들을 치워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 사랑새의 장난감을 넣어준 것이다. 사랑새는 하루 종일 가지를 오르내리며 나뭇잎을 따고 논다. 자연스러운 새의 움직임에 사람들의 시선이 오래 머문다. 사랑새장을 지날 때면 즐거운 새소리에 머리가 맑아진다. 그날 차가운 비바람을 맞으며 울던 20대의 아내가 생각난다. 사느라고 거칠어진 아내의 손을 잡고 새소리를 들으러 사랑새장에 다시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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