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너도 인스타그램에 사진 올리기 전에 보정을 한다고? 지난 봄에 받은 충격은 여전히 가시질 않는다. 친구와 밥을 먹으면서 나온 ‘셀카 보정’에 대한 얘기였다. 친구는 자신의 얼굴이 나오는 사진은 거의 이변없이 보정을 하고 올린다는 것이다. 전후 사진을 보여줬지만 어디가 다른지 긴가민가하다. 자신만 알아보는 흠결이 있고 그 흠을 메꿨을 때의 충족감이 있는 듯 했다. 그 뒤로 다른 친구를 만날 때마다 조사를 하고 다녔다. 얼굴보다는 몸 사진을 보정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사진의 색감을 조정하는 친구도 있었다. 여태껏 소셜미디어에 사진을 올릴 때 싫은 부분은 대충 텍스트나 스티커로 가리던 내 게으름 내지 나조차 몰랐던 둔감함을 생각하는 동시에 소셜미디어가 보여주는 조작된 사진과 완벽한 외모를 향한 인간의 취약성이 생경했다.
보정에 문외한인 나는 소셜미디어 안에서 쉽게 피로해졌다. 거의 모든 게 보정된 사진인 줄도 모른 채 스스로를 화면 속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했다. 기준도 촘촘했다. 몸매와 이목구비는 물론, 입는 옷, 가는 곳, 듣는 음악까지도 비교 대상이었다. 어느순간 노력없이 뭐든 닥치는대로 올려버리고 사람들의 충분한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우리 왜 부끄러워해야 할까. 누가 우리의 인터넷 자아에 수치심을 부여하나. 그건 사회일까, 플랫폼일까, 아니면 서로의 감시자이자 경쟁자가 되는 우리 자신일까.
프랑스의 행위예술가 생 오를랑의 캔버스는 작가 자신의 신체다. 그는 1990년대, 성형수술 퍼포먼스를 통해 입, 이마, 광대, 턱 등에 회화 속 ‘미녀’의 얼굴 일부를 본인 얼굴에 넣었다. "아름다워지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어요. 여성의 신체가 사회의 미적 기준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싶었어요. 성형수술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고요." 신체 개조를 예술로 승화하는 오를랑은 한국에 방문했을 때 획일화된 미의 기준을 위해 성형을 감행하는 한국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모두가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데 왜 남이 만든 기준을 따라가려고 개성을 잃어버리는지 안타깝네요.”
오를랑은 다소 과격하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여성의 신체에 가해지는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압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국 그는 나의 몸이 정말 나만의 것인지, 외부의 압력과 권력의 잣대에 의해 우리 몸은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성형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내 몸의 주권을 꽉 잡고 살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온라인 상에서 좀 더 멋지고 괜찮아보이려는 시도는 오프라인에서의 관계를 늘 염두에 둔 행위다. <인생샷 뒤의 여자들>을 쓴 김지효는 “셀카 보정은 허상의 이미지를 이용해 인정을 받아보려는 헛된 시도나 한심함이 아니라, 온라인의 관계를 통해 그것과 이어져 있는 오프라인 삶을 재조정해보려는 영리한 시도”라고 썼다.
우린 화면을 꾸미고 들여다보는 행위로 타인과 좀 더 연결되고자 한다. 사진 한 장에 달리는 ‘좋아요’ 하나로 우정을 다지기도 하고 댓글 한 개 때문에 우정에 금이 가기도 한다. 결국 사진 보정이라는 건 현실의 관계를 바탕에 둔 조용한 고군분투다. 그걸 알면서도 현실에서 더 빛나는 우리가 평면 속 얼굴에 불만족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 구석이 아프다. 나는 이 전투를 응원한다. 다만 우리가 그 과정에서 외부의 시선을 내면으로 가져오지 않기를, 동시에 나를 사랑하는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