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살 때 내 일상은 냉장고를 지키는 일로 늘 신경이 곤두섰다. 내가 깊숙이 처박아둔 아이스크림. 친구가 선물해준 과자. 운동 끝나고 사온 붕어빵. 운전 연수겸 차를 끌고 봐온 장. 그런 것들은 늘 누군가에게 뺏기기 일쑤였다. “아 그거 왜 먹냐고!” 오빠랑 싸웠는데 내 치킨을 오빠한테도 나눠주라는 엄마 말에 기분 상한 날도 있었고 별것도 아닌 일로 나를 놀리는 엄마가 미워서 우물우물 씹던 엄마의 잡곡밥을 바닥에 퉤 뱉어버린 적도 있다. 식탁에서 아빠가 콧구멍이 못생겼다며 핀잔주면 숟가락으로 코를 가렸다. 엄마는 늘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려 했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주방은 내게 화장실보다도 사적인 공간이라 다른 사람과 함께 살 때면 밥을 잘 못 해먹는다. 누군가 내 식사에 관심을 갖는 것도 부담스럽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음식을 다 해놓고도 망치는 실험을 감행할 수도 없다. 작은 부분만이 허락된 냉장고 속에서 식재료를 썩히는 건 수치인 동시에 습관이 됐다. 누군가와 같이 사는 날들이 길어지면서 마음 한 쪽엔 ‘내 주방이 필요하다’는 욕심이 점점 커졌다. 과연 내가 나만의 주방을 가질 날이 올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와 함께 주방을 쓰는 일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연습해야 할까.
이정 작가는 여자와 음식을 그린다. 여자들이 음식과 함께하는 한 순간을 포착해 거칠고도 섬세한 기술로 캔버스에 담아낸다. 그렇게 그린 그림은 명란바게트, 딸기케이크, 초콜릿과 쿠키, 만두, 배추쌈 등 먹음직스러운 음식으로 가득이다. 이 작가의 그림에서는 음식을 나눌 때의 기분과 나눴을 때 배가 되는 맛이 베어나온다. 짭짜름하고 달큰하고 풍미 있고 때론 인공적인 맛을 물감 너머로 느낄 수 있다. 거기에 함께 나눈 시간과 웃음, 음식을 한 입 베어 먹고 나서 터지는 탄성과 감탄사 같은 게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러고보니 나도 그랬다. 오랜만에 이 작가의 그림을 보니 떠올랐다.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됐을 때, 2년 동안 나만의 주방이 주어졌을 때를 기억한다. 배고픈 친구를 집에 데려와 밥을 해주거나 근처에 사는 친구와 반찬을 나누던 기억. 마음이 힘들 땐 카레나 프리타타처럼 재료를 오래 다듬어 썰고 긴 시간 동안 뜸 들여 요리해야 하는 음식을 했다. 봄엔 커다란 냄비에 완두콩을 쪄먹고 여름엔 이온음료를 커다란 와인잔에 가득 따라마시고 가을엔 뻑뻑한 요거트에 무화과와 꿀을 비벼먹고 겨울엔 방안에 습기가 가득 차도록 어묵탕을 끓여 먹었다.
이 작가의 세계라면, 나는 기꺼이 내 주방을 나누고 싶다. 제철 음식과 유행하는 디저트를 가리지 않고 해먹고 사먹고 같이 먹고 싶다. 음식이 전리품인 뺏고 뺏기는 전쟁 없는 주방을 만들고 원망도 아니꼬움도 없이 다른 사람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배부르게 지켜볼 수 있는 식탁에 앉기. 그날을 대비해 더이상 주방을 두려워하고 싶지 않다. 함께하는 주방이든 아니든, 주방에 물기가 마르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