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엔 스튜디오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한 장 있다. 내가 다섯 살 때 찍은 사진이다. 엄마, 나, 오빠, 아빠가 나란히 앉아있다. 어색해서 볼에 경련이 날 것 같은 미소를 지은 채. 그날의 분위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빳빳한 하얀 스타킹을 신은 탓에 내내 다리가 가렵고 불편했다. 정성스레 화장을 쌓아올리는 엄마를 홀린듯이 바라봤으면서 막상 내 머리를 다듬을 때가 오니 가족사진이라는 이벤트에 싫증이 났다. 정작 스튜디오 안에서 사진을 찍을 때의 순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연두 작가의 <상록타워는> 한 아파트에 사는 서른 두 가구의 모습을 거실 풍경과 함께 담은 사진 작업이다. 사진에 나오는 가족들은 서로의 이웃이다. 다들 미소를 머금고 카메라 앞에 섰지만 어떤 가족은 슬퍼보이고 어떤 가족은 불편해보인다. 희망에 비슷한 긴장으로 가득한 집도 있고 어떤 집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이들이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유일한 단서는 천장등. 집을 꾸민 방식도, 입은 옷과 구성원도 전부 다르다. 네모난 상자 속, 가구 위치만 다른 거실에서 서른 두 가족은 각자의 역사를 만든다.
나는 <상록타워>를 감상하며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왜냐면 화면 속 가족들이 너무 반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너무나 ‘정상적’으로 보이는 이 가족들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엄마, 아빠, 아이들. 다들 자기만의 인생과 사연이 있겠지만 사진만 봤을 땐 적어도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경험은 없어보인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도, 성역할을 답습하지 않은 옷차림을 한 사람도 없다. 모두 흠결없어 보인다. 간혹 거실에 자랑스럽게 걸려있는 상장을 보면 위축되기까지 한다. 그들의 ‘정상성’과 먼 나는 상록타워에서 추방당하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집 가족사진을 볼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즐겁지 않은 상황에서 웃으며 찍은 사진 너머에 여태 우리 집안 사람들 사이 오갔던 폭력, 무시, 폭언, 몰이해 같은 게 보인다. 그런 게 아직도 윤택이 나는 나무 액자에 걸린, 20년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 종이보다 눈에 띈다. 가족 안에서 ‘비정상’ 취급을 받으며 혼나야 했던 날들, ‘정상’처럼 보이기 위해 나를 감춰야 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진 속 다섯 살의 나는 엄마의 이목구비와 아빠의 웃음을 빼닮은 채로 렌즈를 응시한다.
그래서 난 10년, 20년 뒤의 상록타워를 상상한다. 생활동반자법이 재정돼 타고난 가족이 아닌 내가 선택한 가족과 꾸리는 삶. 사회의 기대 밖에 있어도 날 받아주는 공동체가 있는 삶. 다양성이 인정되고 다름이 당연한 삶. 별것도 아닌데. 정상성이 뭐길래. <상록타워>를 보며 일어난 감정은 원망이었던 것 같다. 자연스레 미래의 공동체를 상상하는 날이 잦아졌다. 부디 늘 푸른 상록수와 거리가 먼 공동체가 많아졌으면 한다. 잎이 타보기도 하고 썩기도 하고 떨어졌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간 다시 파랗게 나는 낙엽수같은, ‘정상적’인 모습을 꾸며내지 않은 공동체를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