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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재 Jun 23. 2024

비 내리는 문장 아래 우산은 쓰지 않아요, 제니 홀저

여행을 가면 아름다운 자연, 멋진 건축물, 맛있는 음식도 다 좋지만 무엇보다 길에 붙은 스티커, 벽에 쓰인 그래피티가 내 눈과 맘을 사로잡는다. 아무렇게나 락커로 휘갈긴 하트, 매직으로 써내린 희망찬 문구나 격렬한 투쟁의 메시지, 볼펜으로 벽에 쓴 ‘아무개 왔다감’ 같은 사사로운 기록에 이끌린다. 작은 끄적임이 그 마을이, 마을에 머문 사람들이 통과한 세월을 보여줄 때면 지금, 여기, 내가 위치했다는 사실이 사뭇 새롭게 다가온다.


가끔은 그렇게 마주친 문구들이 그 여행의 요약본이 되기도 한다. 지난 겨울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갔을 때다. 길을 걷다 ‘Keep smiling :) (계속 웃으세요)이라고 쓰인 다정한 그래피티를 만났다. 그 문구가 여행 내내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추운 겨울, 해외에서 혼자 산 지 일 년이 좀 넘게 지났을 시점이었다. 혼자 방에 누워있는 날이 많아질 수록 웃는 날도 적어져서일까. 그 문구는 그간 사람들과 함께 나눴던 웃음, 그리고 우울이 깊을 때 이유없이 혼자 지어보는 미소 같은 걸 생각나게 만들었다. 엘릭 스코브의 책 ‘우울할 땐 뇌 과학’에서 배운 대로 웃음이 어떻게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는지 되새기며 남은 날도 어떤 이유에서든 웃으며 보내기로 다짐했다. 현실에서 꽉 쥐고 살아낼 동아줄이 없을 때 나는 이런 우연 속에서 발견하는 글자를 마음에 새기곤 한다.


제니 홀저, <Installation for Bilbao>, 1997/2017


뉴욕에서 활동하는 개념예술가 제니 홀저의 작품은 한 편의 시다. 다만 디지털 형태를 띠고 있어 눈에 좀 더 잘 들어오는 시. 디지털화 된 글자는 대개 중요한 정보를 담는다. 현재 시간, 주의 사항, 출발지와 목적지. 그래서인지 홀저의 메시지는 왠지 모르게 내게 중요한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홀저의 작업을 봤을 때, 난 잠시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어두운 공간 안에서 번쩍이는 LED 사인들. 정신없이 지나가는 영어, 스페인어와 바스크어로 된 단어들의 물결. 그 앞에서 난 어떤 마음으로 서있었나. 아무 단어나 내게 와닿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재빠르게 올라가고 내려가는 불빛을 고개를 주억거리며 쫓았던 것 같다.


깜빡이는 LED 사인 안에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고요를 발견한다. 언어를 통해 홀저는 관객에게 사유의 시공간을 제공한다. “LED 사인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움직일 수 있는 능력에 있다. 나는 이것이 입으로 전달하는 말과 비슷하여 좋아한다. 글자를 강조하거나 흐르게 또는 멈추게 할 수 있는데, 내게는 이것이 마치 우리가 목소리로 내는 억양의 동적 등가물처럼 느껴진다.” 홀저의 말대로, 그가 빛으로 쏘는 글자는 음성처럼 각인된다. 때로는 누군가 내게 건네는 말 같고, 주의깊게 들은 노래 가사같기도 하며, 가끔은 귀기울이기 어려웠던 마음의 소리같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내 마음에 들어오는 메시지도 달라진다. 그렇게 들어온 메시지는 어떤 광고나 선전보다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없던 의미도 내 안에서 생긴다. 홀저가 선택한 문장이 LED판을 타고 위로, 아래로 오르락 내리락거리는 모습은 쉴새없이 생각을 이어가는 내 머릿속 같다. 번쩍이는 빛이 날 어지럽히는 순간, 잠시 멈춰 문장 하나를 택한다. 낯선 단어의 조합은 이전에 조명하지 않았던 생각을 일깨운다. 무작위의 무의미한 문장같아 보이는 글자의 나열이 내 여행을, 그 시기를, 한 삶을 바꿀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비 같은 문장이 내 안으로 스며들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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