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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Sep 20. 2021

호주, 빈티지 모자 패션쇼에 나섰다.

여인들이 모자를 쓴 이유는?

빈티지 모자 패션쇼가 스킵튼에서 열렸다. 

동네 적십자 부인회에서 해마다 자선행사를 기획하는데 올해의 주제는 바로 'Vintage Hat Parade'였다. 

이웃 마을 리스모에 사는 80세의 도로시 할머니는 중고옷을 모으는 수집광이시다. 평생 수집한 옷들을 보관하기 위해 자기가 사는 집보다 더 큰 창고를 집 바로 옆에 따로 하나 구했을 정도다. 지난해엔가 그 창고를 구경하러 갔다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수천벌의 중고 의상들과 모자 구두 액세서리 등등으로 그 넓은 창고에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옷이 너무도 좋아 모으기 시작했다는 그녀의 수집 철학은, 중고일 것, 특별한 사연이 묻어 있을 것, 시대적 트렌드를 나타내거나 강한 개성이 있을 것 등등이다. 그녀는 옷걸이에 걸린 옷 중 이것저것을 뽑아 보여주면서 총명한 기억력으로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셨다. 이웃에 살던 아무개가 60년 전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인데 당시의 트렌드인 무엇을 따르고 있다는 등등의 얘기였다.    

이 낡은 옷들을 어쩌자고 이렇게 모으시는 건가,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이러시나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 이 분은 아직도 정기적으로 중고 가게를 드나들며 헌 옷을 수집하고 정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주변 분들도 할머니의 수집에 도움이 되고자 자기 옷장 속 깊숙이 두었던 특별한 옷들을 종종 이 분께 기증하기도 한단다.   

지난해에는 멜번 모대학 의류학과 교수가 탐방해 '복식사적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이 많이 있다며 제자들과 다시 들러도 되겠냐는 제안을 했다고 흥분해하셨다. 그녀의 평생 노고가 뒤늦게 입소문을 타 80을 넘긴 요즘 여기저기서 쇼와 전시 의뢰가 이어지고 있다. 자기의 뒤를 이어 누군가가 이 옷들을 관리해 주거나 작은 박물관이라도 여는 게 이 분의 꿈이다. 


마을의 적십자회에서 이 분께 자선 행사를 의뢰했고 도로시 할머니는 자기 소장품을 중심으로 1920-80년대에 걸친 모자의 시대별 트렌드를 보여주고자 이 패션쇼를 직접 준비하셨다. 스킵튼과 리스모에서 착출 된(?) 백발의 할머니부터 아줌마 10대 소녀들까지 동네의 여인들이 모델로 나섰다. 할머니께서 내게도 모델이 되어달라고 해서 큰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전에 할머니께서 기획했던 동네 작은 패션쇼를 재밌게 구경한 경험도 있고 혼자서 여러 일을 힘들게 하시는 걸 알기에 옆에서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대답을 해놓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번 쇼의 규모가 지난번보다는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게 됐고 마음의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아직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마을엔 이미 광고 포스터가 나붙기 시작했고, TV에 나오는 유명 리포터가 진행을 한다는 소리도 들렸다. 게다가 장소는 호주 38대 Victoria 주지사를 지냈던 Henry Bolte경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스킵튼의 유명한 저택 정원으로 확장되었다. 일이 커질수록 걱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쇼를 앞두고 여러 준비로 정신없는 할머니 마음을 산란하게 할 수는 없었다. 드레스 피팅을 하러 오라는 호출을 받고 정신없이 할머니 댁으로 달려갔다. 할머니의 작지 않은 집과 커다란 창고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고물인지 보물인지 구별을 하기 힘든 가운데 할머니는 자기가 필요로 하는 아이템을 그 억수산 속에서 신기에 가까운 기억력으로 찾아내셨다. 

"그러니까 이 모자엔 분홍 스카프가 어울리겠지. 어디 하나 있었는데.. 아! 여기 있다." 하는 식으로.  

이 쇼를 통해서 8명의 모델이 대략 1백 여개의 모자를 선보였는데 할머니는 혼자서 다 찾아내고 코디하고 심지어는 50킬로나 떨어진 행사장까지 몇 차례씩이나 직접 운전해서 소품들을 옮기기까지 하셨다.  

게다가 모델들 교육까지 꼼꼼히 시키셨다. 이런저런 모자를 씌우고 벗기고 연구를 하시더니, '이런 모자를 옛날 여인들이 어떻게 썼는지 보여줄까?' 하시는 거다. 백과사전처럼 두꺼운 시대별 패션 책자를 들고 오고 어디서 구했는지 흑백 패션 다큐멘터리 비디오도 보여주셨다. 또 계속 자신이 좋아하는 '가르보 스타일'이 어쩌고 하셔서 무슨 말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30년대 명배우 그레타 가르보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녀가 나오는 영화 필름을 보여주시면서 '난 저 배우의 날 선 모습을 너를 통해 재현하고 싶어' 하시는 거다. 

"헉...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그래서 나는 결국 이런 모자들을 쓰고 쇼를 했다.^^ 

살짝 올려 쓰고 

옆으로 기울여 쓰다가 

망사를 내려 가리기도 하고 

꽃으로 뒤덮기도 하다가 

푹 눌러쓰고...

각 시대에 유행했다는 모자들을 바꿔 쓰면서 그 여인들의 마음이 되어보려고 상상했다. 이런 류의 모자들을 썼던 옛날 영화 속의 여배우들이 하나씩 떠올라 즐거웠다. 잠깐잠깐이었지만 그 시대의 그녀가 되어보는 것이다. 다른 호주의 여인들도 이런 옛날 모자는 처음 써보는 거라며 즐거워했다.        

"우리 오늘 오페라나 보러 갈까?" 예술을 즐기던 1920년대 여인들. 실은 동네에서 아이들과 같이 모여노는 옆집 아줌마들이다.
사회를 본 리포터와 한장, 백발의 도로시 할머니도 감사장을 받았다.

쇼가 끝나고 도로시 할머니는 150여 명의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정말 대단한 여인이었다. 혼자서 이 많은 일을 어찌 다 해내는 건지 노인의 열정 체력 기억력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회자는 이곳 채널 10 아침 쇼에 나오는 죠지 코헨이란 리포터였다. 자신도 시골 출신이라 이런 마을 분위기를 잘 알고 좋아하지만 요새도 이런 따뜻한 마을이 있다는 게 놀랍다고 했다. 주최 측의 뜻을 알고는 출연료도 한 푼 안 받고 먼길을 달려왔단다. 예쁘고 쾌활한 여인이었다.  

쇼 전에 찍었다면 더 풍성하고 멋있었을텐데.

쇼를 끝내고 가보니 수십 가지의 케이크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적십자회 활동을 하는 마을 여인들이 공들여 구워온 것들이었다. 다이어트란 있을 수 없다. 한 접시 가득 담아 머리가 띵하고 속이 느글 댈 때까지 즐겼다. 진한 커피 한잔 마시며 여인들과 패션과 지난 시간에 대한 수다를 떨었다. 

초콜릿 낙엽 장식을 한 "케서린 햅번 머드 케이크'. 어느 요리사가 이 여배우에게 헌정한 레시피로 만든 케이크이라는데 구경만 한 뒤 경매에 붙여 팔았다. 이날 모든 수익금은 적십자를 통해 지역사회 구제와 발전을 위해 쓰인단다.   


이날 파티에서 했던 몇 가지 생각들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첫째, 도로시 할머니의 열정.

지난해 대형 수술을 한 팔순의 할머니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 이토록 열성적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곳의 노인들은 독립적 생활을 당연히 여기는지라 자식이나 주변에 기대기보다는 삶을 끝까지 스스로 꾸리려고 한다. 혼자 사는 분들도 많으신데 외로움 질병 등등과 싸우면서도 죽는 날까지 자기의 일상에 충실하고 삶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으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둘째, 세대 간 차이는 있되 단절은 없다는 것.

나이나 성별 세대가 달라도 하나의 주제 앞에 자연스럽게 묶이고 소통하는 것을 보면 놀랍다. 수십 년이 지난 유행이지만 어린 소녀들이 관심 있게 바라보며 엄마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즐기고, 이웃 마을 노인의 열정에 진심으로 공감하며 따뜻한 박수를 보내는 것이 보기 좋았다.    


셋째, 다양한 미에 대한 존중이 있다는 것.

젊은이나 늙은이나, 미인이나 추인이나 나름의 미에 대한 차이가 있겠지만 어느 세대가 우월하거나 밀리지도 않고, 하나의 미를 획일적으로 추앙하지 않으며 각자의 연륜과 개성, 자신감으로 당당한 모습들이 새로웠다. 일상적으로 외모를 평가하고 평가받는 사회보다 훨씬 행복하게 편안하게 살겠구나 생각했다.   


할머니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쇼가 성공적으로 즐겁게 마무리된 것을 감격해하셨다. 한 사람의 열정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즐거웠던 오후였다. 잠시 남의 옷을 입고 남의 집 정원에서 다른 시대의 다른 여인이 되어본 색다른 경험. 모자 하나 머리에 쓰고 타임머신을 타듯 시대를 날아다녔다. 저 모자를 처음 썼던, 나에게 영감을 준 여인들에게 고맙다. 나를 모델로 뽑아준 도로시 할머니도, 대단하지도 않은 모습에 박수를 보내준 마을 사람들도. (2010년 5월 9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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