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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Sep 10. 2021

호주 시골, 입 벌어지는 '중고서적' 축제

종이책의 미래는?

클룬(Clune)이란 작은 시골마을에서 'Old Book Fair'를 주말에 열었다. 한마디로 '중고서적 축제'를 한다는 거였다. 'Back to Booktown'이란 부제가 붙은 걸 보니 괜찮은 서가 마을로 왕년에 이름을 날렸었나 보다.

예전에 이 마을을 한번 여행한 적이 있는데 한적한 옛 건물들이 영화 세트장처럼 반듯하게 늘어서 있어 따뜻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마을은 '네드 켈리'라는 호주의 유명한 실존 강도(한국의 홍길동쯤 되는)의 삶을 그린 영화의 촬영지였다고 한다.  

어쨌든 책 냄새도 그립고 옛것에 대한 향수도 더듬을 수 있는 기회라 생각되어 찾아가 보았다. 거리 양쪽의 작은 상점들이 모두 서점으로 변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카페 레스토랑 골동품 가게 선물가게 꽃가게 차 정비소 마을 회관과 가정집 앞마당까지. 이 많은 상점마다 가정집마다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모든 곳곳의 장소들이 서점으로 변신을 한 거다. 그것도 모자라 거리마다 골목마다 천막을 치고 책을 늘어놓았다. 온 마을이 책으로 뒤덮인 것이다.

알고 보니 이 마을은 평소엔 그저 중고서점이 한두 곳 있을 뿐인데 중고서적 희귀 서적 신간 등을 다루는 전국의 온갖 서적상들이 축제기간 동안 가게를 임시 대여해 책을 판다는 거였다. 그러니 천지사방이 오로지 책! 책! 책! 

그런데도 서점마다 기존의 가게와 어우러져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뿜어냈다. 꽃가게에선 식물도감이나 정원 관련 책을 팔고 차 정비소에선 지도나 여행 차를 주제로 한 책을 파는 식이었다. 단순하게는 책을 진열하거나 전시하는 장소와 모습이 기발하고 다양해서 놀랐고 요리책에서 군사기밀 전문서적까지 온갖 분야를 망라한 잡다함에 입이 벌어졌다.

신청곡을 받으면 악보를 찾아 내어 오건 안에 집어 넣는다.

어디 그뿐인가. 마을의 브라스 밴드가 나와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고 마을 곳곳에선 소시지나 피자 도넛을 구워 팔고 커피도 끓이고 아이스크림이나 색색의 요란하고 별난 사탕도 팔았다.

마을 한쪽에선 콘서트 스트릿 오건(Concert Street Organ)이란 특이한 악기도 만났다. 음마다 구멍이 다르게 뚫린 종이 악보를 끼우면 기계가 돌아가면서 스스로 음악을 연주하는 신기한 시스템이었다. 벨지움 작가에 의해 1884년에 제작되었다는 이 악기는 트럭 뒤에 매달려 호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장터에서 음악을 연주하는데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 플루트 셀레스타 트롬본 등 18가지의 악기에 73개의 음이 더해져 음악을 만든단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배경음악으로 어울린 만한 매우 고풍스럽고 향수를 자극하는 음색이었다. 이 오건 앞에서 사람들은 춤도 추고 음악도 신청했다. 레퍼토리도 수십 가지인데 음악 한곡에 해당하는 악보는 대백과 사전 두 권의 두께로 두툼하며 세월을 드러내듯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마을회관은 온갖 서점상들과 그들이 늘어놓은 책과 구경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 멀고 구석진 마을까지 책을 찾아보겠다고 온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그들 중에는 수집 가치가 있는 특정 책들을 이 잡듯 뒤져 찾는 이들도 있고, 멀쩡한 책을 찢거나 오리거나 접어서 공예 작품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그림 작가들은 직접 화판을 들고 나와 그림을 그리며 자기 이름이 박힌 책을 팔았다.

유명 작가를 모신 초대회나 토론회도 곳곳에서 열렸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 텐트도 있었다. 5불을 내고 들어가 온갖 어린이 책들을 마음대로 읽었고 게임도 하고 과일도 먹고 페이스 페인팅도 하고 그림도 그렸다. 하얀 텐트 아래서 볏단 위에 앉아 낡은 담요를 두른 채 아들과 원 없이 그림책을 보았다. 아.. 나도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길거리 한가운데서 인형극도 열렸다. 작은 무대에서 막대로 인형을 조정하는 엉성하고 스토리도 단조로운 극이었는데 그 앞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인상적이었다. 인형들이 치고받고 싸움을 하자 아이들은 손을 흔들고 소리를 치며 쳐라! 박아라! 훈수를 들고 매우 열성적으로 관람을 했다. 세계 챔피언 권투 타이틀 매치를 보는 관중처럼 흥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하나가 되어 이런 축제를 해마다 연다니 참으로 대단해 보였다. 아직까지도 책을 사랑하고 종이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는 현실이 안도되었다.


얼마 전 멜번에 갔다가 크게 충격받은 일들이 있었다. 호주엔 보더스(borders)라는 초대형 서점 체인이 있는데 멜번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쇼핑센터 두 곳에 각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널찍한 쇼핑센터 안에 무려 3개 층을 털어 최고의 규모와 수준을 자랑하는 곳들이었는데 그중 한 곳이 파산으로 문을 곧 닫는다고 했다.

그 멋있던 인테리어며 훌륭했던 서점이 폐점 세일을 한다며 책꽂이까지 가격표를 붙여 팔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황당하던지. 또 다른 곳의 체인점은 세 개의 층을 단층으로 대폭 축소해놨다. 그런데 그곳도 예전의 고상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문구와 잡판 커피를 파는 번잡한 분위기로 변해있었다. 이런 날이 머지않아 오리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까지 급하게 올 줄이야..

이 날 북페어를 훈훈한 마음으로 즐겼지만 머지않아 종이책이란 정녕 이런 구석진 곳에서 추억으로만 만나게 될 것인가란 생각이 들어 허전하기도 했다.

내 아이가 손으로 한 장씩 넘겨 종이책을 읽는 마지막 세대인 걸까? 아니 어쩌면 이들도 어린 시절 자기가 책을 넘겼던 사실을 훗날 아주 가물게 기억할지도 모른다. 아이와 같이 더 많은 종이책을 읽어야겠다. 지금 읽는 그림책들을 고이고이 보관하고 싶다. 개인의 추억이 될 것이고 시대의 유물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ㅎ

(2011/5/2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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