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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Jan 28. 2022

호주인들은 왜 회의(meeting)에 열심인가?

시골 소모임에서 배운 민주주의란?


작은 시골 마을로 이사 오면서 나의 사교권에 또다시 대지각 변동이 생겼다. 한국에서 처음 호주로 올 때도 아는 사람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을 혼자 한다는 것이 새롭고 힘들었는데, 이제 또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낯설고 조용한 땅에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이번엔 가족과 함께) 마을엔 500부 정도 발행하는(주민이 5백 명이니) 지역 정보지가 있었는데, 취미나 봉사, 교육과 관련된 크고 작은 모임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흡사 대학의 동아리 혹은 문화센터 같은. 사람들도 만나고 활동도 하면 조용한 시골 생활도 심심하지 않겠다 싶어 필요하거나 관심이 가는 단체 몇 개를 골랐다. 3살 미만의 아이를 둔 엄마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플레이 그룹’, 한 달에 한 번씩 정기모임을 갖고 가끔씩 촬영 여행도 같이 다니는 ‘사진 클럽’, 마을 발전에 기여하는 점이 마음에 들어 같이 봉사하고자 ‘라이언스 클럽’ 그리고 건강을 위해 ‘골프 클럽’ (여기서는 매우 저렴한 서민 스포츠인 데다가 골프장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등에 가입했다.


주로 은퇴한 노인들이나 농장 아저씨 아줌마들이 모이는 지극히 아마추어적인 작은 규모의 동네 모임들이었는데, 모임 운영방식이 한국과는 다르다는 걸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회의’였다. 모임이 크건 작건, 이들은 항상 ‘회의’를 했고, 모든 회원들의 의견을 모으는데 ‘총력’을 기울였으며, 모든 의논을 ‘회의록’에 기록했다.


가령, ‘사진 클럽’의 경우를 보자. 10여 명이 모이는 월 모임에 가면, 정작 찍어온 사진들은 한쪽 구석에 두고, 회장과 총무가 앉아 회의부터 진행한다. 참석자, 불참자를 기록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매달 찍을 주제를 정하거나 전시회 준비 촬영여행 등을 회의한다. 1월엔 과일을 찍자, 2월엔 인물을 찍자.. 뭐 이런 단순한 내용들도 의견을 내고 동의를 구하고 제청을 거쳐 결의를 한다. (다행히도 일 년 치 주제를 한 번에 정한다.) 동의자 제청자 이름도 회의록에 일일이 적는다.(규모가 작아서인지 다수결보다는 이 방식을 선호한다.)


플레이 그룹에 가도 엄마들이 10여 명 모여 회의(일 년에 서너 번)를 한다. 아이들 활동을 준비하는 순번을 정하는 것에서부터, 물품 구비, 대청소 등등 모임 안팎에서 생기는 모든 일들을 회의를 통해 의논한다. 예로, 어떤 엄마가 ‘우리 한 번씩 애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저녁 시간에 모이자(Girl's Night Out)’고 안건을 내놓으면 얼마나 자주 만날까(일 년에 두 번 혹은 세 번), 만나서 무얼 할까(저녁 볼링 혹은 영화) 등을 의논하고 동의자를 구하고 또 제청자를 찾은 뒤 결정한다. 회비를 걷고 쓰고 해도 30만 원 선을 넘지 않는 소규모인데, 은행 거래내역서까지 매번 가져와 공개한다. 한국 같으면 그냥 밥 먹어가면서 수다 떨면서 대략 정해도 크게 문제 될 게 없는 듯한 내용들을 죄다 안건으로 올려놓고 전회원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골프 클럽이나 라이언스 클럽은 가입 허락조차도 기존 회원들의 회의를 거친 뒤 결정된다. 동의가 충분히 구해지지 않은 안건들은 보류된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개의치 않는다. 모든 회원들과 충분히 타협하기 전엔 일을 진행하지 않는다.


지난 한 달간 클럽이 받은 공문이나 보낸 이메일 등도 기록한다. 이웃 마을 사진클럽에서 ‘같이 모임을 하자는 편지’를 받았다거나 지난달 받은 어떤 공문의 답장을 회장 이름으로 보냈다거나 하는 것 등등. 회장이 대표로 받은 공문들은 회의에 직접 들고 와 원하는 회원들이 읽을 수 있도록 공개한다. 이렇게 회의를 하고 나면 총무는 회의록을 정리해서 며칠 안에 전회원에게 이멜로 다시 보낸다. 다음 회의 땐 이 회의록에 이견이 있는지 동의하는지부터 묻고 들어간다.

교회 여전도회 모임을 가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7-80대의 할머니 5-6명이 모여 회의를 한다. 그동안 모여서 같이 뜨개질한 담요 3 장를 어느 단체에 기부할까 같은 안건들. 아프리카에 보내자는 할머니와 호주 국내에도 필요한 단체가 있을 것이라는 할머니가 서로 의견을 경청하고 회원들의 지지를 호소하다가 서로 만족할 만한 결론을 낸다. 회의를 통해.

안건은 사사롭지만, 형식은 주주총회라도 하는 마냥 공식적이다. 물론, 마을 사람들인지라 서로 웃어가며 ‘이번엔 내가 동의할 차례인가’ 하며 거수를 하지만 그 어떤 절차도 건너뛰는 법은 없다.


회의를 하고 의견을 모으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당연한 거지만, 이 작은 마을의 작은 모임에서 아주 작고 사소한 문제까지도 대화하고 타협하고, 몇 명 안 되는 전체 회원의 관심과 동의를 주시하고, 정확히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때로는 이 모든 과정들이 쫀쫀하고 답답해 보이기도 하고 애들 장난 같기도 하고 너무도 비효율적으로 시간과 인력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모임에 대한 신뢰도 생기고 책임도 생기고 개개인이 회원으로서 충분히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임을 빠져도 어떤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소상히 알 수 있다. 어떤 일이 잘 되었을 때 혹은 잘못되었을 때 공과 실 책임 소재도 누구나 투명하게 간단하게 추적할 수 있다. 

일전에 멜번에 있을 때 회의록에 기록된 내용 덕분에 커다란 오해를 벗은 경험이 있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회의록의 위력을 눈물 나게 체험했다. 어떤 이의 합류를 내가 반대했다는 악성 루머로 곤경에 몰렸는데, 누군가가 우연히 그의 합류를 찬성하는 안건에 동의자(seconder)로 내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회의록에서 찾아냈다. 난 시간이 많이 흘러 회의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고 회의록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각 회원은 개인으로서 공평하게 힘이 있고, 어떤 의견이든 말하고 들을 장이 있고, 내 뒤에서 나 모르게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것 등등 회의의 장점들이 나를 점점 회의에 대해 인내 잘하고 회의를 즐기게 만드는 것 같다. 민주주의가 겉돌지 않고 토착화된 사회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해 봤다.(2009/04/24 씀)



동네 사진 클럽 멤버들. 은퇴한 노인들, 학교 선생님, 우체부, 수퍼 점원, 농부의 아내, 전업주부 등등..

사사로운 소그룹 모임이지만 큰 일도 회의를 통해 뚝딱 잘 벌인다. 이 날은 전문장비를 빌려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서 사진 촬영을 했다. 1년에 한 번씩 여러 지역의 아마추어 작가들을 초대하는 규모 있는 사진전도 할머니 몇몇이 뚝딱 벌였다.

옛 글을 정리해 올릴 때마다 그 시절이 생각나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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