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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Mar 02. 2022

호주에서 '원조교제'할 뻔한 사연 ^.~

호주인들 나이 짐작이 어려워.

그러니까 내가 호주에 첫발을 디뎠던 30살 때의 이야기다. 물설고 낯설고 언어설은 이국땅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 단체에서 주관하는 환경자원봉사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5일간 호주 국내외 젊은이들과 팀을 이뤄 캠핑등을 하며 국립공원 등지에서 잡일을 하다가 주말엔 멜번의 한 숙소에서 쉬는 게 시스템이었다. 팀에서 만난 훤칠한 호주 청년이 일하는 내내 친절을 베풀더니 주말에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게 아닌가!  

멜번 시내 구경하러 나갈래?” 


난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1) 시간이 많았다.

2) 할 일이 없었다.

3) 아는 사람도 없었다.

4) 멜번 시내를 나간 본 적도 나가는 방법도 몰랐다. 게다가

5)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겼고 점잖았으며 내게 친절했다. ^^

거절할 이유가 있어도 묻어두었을게다.


그래서 햇볕 쏟아지는 토요일 아침, 우리의 멜번 투어는 시작됐다. 동네 산책길을 얼마간 걸은 뒤 트램을 타고 시내로 나갔다. 그는 유창한 영어로(호주인 아닌가.^^) 구석구석 안내도 잘했고 (자기 동네니 아는 것은 오죽 많은가!) 나는 그의 가이드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했다.

시내 중심 플린더스 기차역

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야라 강변에 이르렀다. 멜번 시내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잔잔한 강 위로 작은 유람선들이 떠다니고, 강변 한쪽으로는 분위기 좋은 카페들이 즐비하며 그 맞은편으로는 고풍스러운 플린더스 기차역이 서있는 아름다운 명소였다. 강바람에 금발의 긴 머리가 휘날리면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쓸어 귀 뒤로 넘기는 그를 옆에 두고 나의 기분은 점점 고조됐다.


그 강변의 끝자락엔 호주에서 손꼽히는 ‘크라운 카지노’란 대형 위락 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난 도박을 경멸하고 지금껏 고스톱도 칠 줄 모르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둘러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지노 앞에 서있던 덩치 큰 직원이 그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그가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밖에서 기다릴 테니 혼자 들어가서 보고 나오라’는 것이 아닌가. 상황 파악이 안 된 나는 ‘왜 같이 가지 않냐?’고 아무 생각 없이 되물었더니……….

난 미성년자라서 들어갈 수 없어.’

‘헉………………………………세상에나……………………’

그는 18살이 채 안된 거였다. 고등학생이었다.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직원의 요구에 차마 학생증을 내놓지 못한 거였다. 

난 정말 몰랐다. 그가 나보다 몇 살 어릴 거란 짐작은 했지만 10대일 거라곤 상상을 못 했다. 그 뒤로 정신이 확 깨서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만에 하나 카지노 안에 같이 들어갔다가 그 안에서 발각됐다면 난 미성년자를 유해 장소로 끌고 온 불순한 여자가 되어 법의 심판을 받았을지도.


그랬다면 이런 변명(먹힐지 모르겠지만)을 했을게다. 내 눈엔,


1.     서양인들은 숙성하다.

덩치도 크고, 어린 나이에도 성숙한 행동과 차림으로 다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가령, ‘타이타닉’에 나오는 케이트 윈슬렛은 영화 속에서 십 대 중반의 소녀이다. 내 눈엔 아무리 봐도 완숙한 30대 여인 같아서 ‘저 감독은 왜 저리도 나이 있는 혹은 나이 있어 보이는 여배우를 캐스팅했을까’ 했더니, 같이 본 서양 남자는 ‘내 눈엔 그녀가 청순하고 연약한 10대 소녀’라고 대답했다.

한편, 서양인들도 동양인들의 나이를 잘 가늠하지 못한다. 체구도 작고 하는 행동도 상대적으로 귀엽고 아이 같아 보일 때가 많다. 난 30대에도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이상한 요구를 종종 받곤 했다.


2.     호주인들은 더 노숙하다.

호주의 햇볕은 해롭기로 악명 높다. 피부암 발생 세계 1위의 국가인 만큼 국민들의 피부 상태가 매우 안 좋다. 어릴 때부터 자외선을 대책 없이 쐬여서 10대 후반이 되면 눈가에 잔주름이 지고 20대 중반엔 입가와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힌다. 온 얼굴과 몸을 덮는 잡티와 주근깨 검버섯은 말할 것도 없고. 30대가 되면 온몸의 살과 피부가 처지고 40대가 되면 모든 탄력이 사라진다. 게다가 한국처럼 요란하게 피부나 외모를 관리하는 이들이 드물며 그냥 생긴 데로 산다. 대체로 보이는 나이에서 10살 혹은 15살 이상 빼야 그들의 본래 나이가 나온다고 봐야 할 듯.


호주에 온 지 얼마 안 된 나로서는 만나는 이들의 나이를 제대로 짐작하기 어려웠고, 또 나이를 문제 삼지 않고 동등하게 대화하고 친구가 되는 분위기로 인해 상상도 못했던 일일 원조교제가 성립된 거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 주말을 끝으로 우린 다른 팀으로 배정되어 더 볼 일이 없었다. 내 나이를 끝까지 밝히지 못한 건 그의 충격이 염려되서였다. 그냥 즐거웠던 ‘멜번에서의 하루’로 기억하고 기억되고 싶다. ^^ (2010/3/10 씀)

   


우울한 뉴스가 많은 요즘 우스운 옛날 글 하나 올려본다. 요즘은 호주인들의 나이를 꽤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예전엔 모든 이들이 나이 많아 보였는데, 이젠 내가 나이를 먹어서인지 주름 잔뜩 진 호주인을 봐도 젊고 파릇하단 생각을 하기도 한다. 오히려 한국인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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