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가치는?
호주는 스포츠 천국이다.
교육부는 1-10학년 전학생들이 일주일에 최소 두 시간(실제로는 훨씬 더 많이 한다.) 스포츠를 하도록 의무로 정하고 있다. 자전거 타기, 하이킹, 서커스, 무용 등의 온건한 활동부터 풋티(호주식 럭비) 네트볼(농구와 비슷한데 여학생들이 주로 한다) 축구 달리기 수영 발레 등 격한 운동에 이르기까지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대부분의 학교는 풋볼이나 네트볼팀을 연령별로 구성하는데 수시로 교내, 학교 간, 지역별 혹은 국제 대항을 벌여 지속적으로 실전 경험을 쌓도록 강조한다. 또 계절별로 나이와 능력에 맞는 여러 스포츠를 경험토록 하는데 여름이면 근교의 수영장에 가서 전교생이 수영을 배운다든지 외부 강사를 초대해 승마나 테니스 골프(비싼 사립학교는 물론 공립학교에서도)를 배운다든지 하는 것이다.
학교나 마을마다 잘 정비된 구장이 종류별로 있어 어릴 때부터 여름엔 크리켓, 겨울엔 풋티 등등 종목을 바꿔가며 팀 스포츠를 하도록 권장한다. 또 학교 이외에도 동네별 스포츠 클럽 활동이 매우 활발해 주말이면 온 가족이 스포츠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스포츠 교육을 통해 신체의 단련과 균형적 발달은 물론이고 건설적 조직적 경쟁적인 환경 속에서 한 게임씩 치러 나가며 적극적 자세, 대화의 기술, 결단력, 자신감, 사회성, 긍정적이고 건강한 생활 방식을 익히는 것이다.
나의 15살 아들은 요즘 풋티와 농구에 빠져 있다. 일주일에 두 번 동네 구장에서 훈련을 하고 주말이면 다른 동네팀과 경기를 한다. 농구는 일주일에 한 번 훈련을 하고 수요일 저녁에 이웃 마을 팀과 경기를 치른다. 한국이라면 고1에 해당되어 한창 공부에 열중해야 할 때인데 거의 매일 방과 후에 스포츠를 하는 것이다. 아이의 친구를 봐도 너나없이 한두 가지의 스포츠를 해서 상황이 비슷하다. 그렇다고 이들이 프로 선수가 되려는 것도 아니다. 아들을 쫒아다니며 근래에 느꼈던 한국과는 달랐던 스포츠 교육 안에서의 문화 차이 몇 가지를 나눠보겠다.
1. 스포츠는 공부 못하는 사람들의 차선책이 아니라는 것.
왜 이런 편견을 갖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넌 머리가 안되니까 몸으로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라는 식으로 운동을 권유했던 것 같다. 또 공부는 포기하고 운동만 죽어라 하니 무식해질 수밖에 없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호주에서는 공부 잘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운동을 하고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아 무식하기는커녕 매우 똑똑하기도 했다. 학업을 중요시하고 운동을 터부시 하던 한국 사회 분위기가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도 갖지만, 어쨌든 나의 이런 편견이 깨진 것은 호주에 온 뒤였다.
2. 운동은 헝그리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데 스스로 좋아서 선택하고 자발적으로 훈련하며 자신과 싸워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 배가 고프지도 않으면서 또 운동을 해서 먹고사는 것도 아닌데 취미 이상의 취미로 심각하게 훈련하고 극기하며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
감독이나 코치의 폭언이나 폭력이 없어도 첫새벽 일어나 홀로 운동하고 학교 다녀와서는 또 훈련하고 주말에 지역을 돌며 시합을 한다. 힘들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십 대 들을 볼 때 난 또 놀랐다.
거칠고 폭력적인 선수들의 세계, 비정한 돈이 어둡게 오고 가는 곳에서 가난한 선수들은 지도자와 선배로부터 매 맞고 학대받으며 훈련하다가 혹은 승부욕에 불타는 부모에게 끌려 다니며 운동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3. 스포츠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교육이다. 입시나 성취를 위한 도구나 수단이 아니다.
운동을 하면 두뇌가 계발되고 학습능력이 향상된다는 연구가 있으니 한국 학생들도 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들었다. "체력이 향상되면 책상 앞에 더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다."며 운동 본연의 목적까지도 학업과 연결시킨다. 호주 스포츠에서 강조하는 건 학생들의 체력증강과 함께 운동의 재미를 알려주는 것, 그리고 '스포츠맨 쉽'을 익히게 하려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고 팀 안에서 동료애를 키우고 승패에 깨끗하게 승복하는 자세, 평생 스포츠를 즐기며 건강과 행복을 누리라고 가르친다.
4. 다양한 리그가 있다.
시즌이 되면 무수한 리그가 학교 동네 지역별로 운영된다. 그러다 보니 잘하는 아이들은 상급 리그로 이동하기도 하고 스카우트도 빈번하다. 그런데 이곳 부모들은 자녀들이 비슷한 수준의 선수들과 대등한 경기를 치르는데 중점을 둔다. 몇몇 특출한 선수들과 경기를 하며 패배감을 맛보기보다는 재미를 느껴 꾸준히 하는 것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여러 해 운동하면서 자기에게 맞는 리그와 팀을 찾아 수시로 이동한다.
농구를 할 때 키가 얼마나 큰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발레를 할 때 체중을 문제 삼지도 않는다. 모든 문은 열려있고 좋아서 입문한 아이들이 알아서 조절하고 훈련하다가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도 하고 다른 종목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스포츠는 공정한 경쟁을 통해 승패를 가리는 분야이지만, 두 팀 간에 점수 차가 큰 경우 스코어 계산을 중지하기도 한다. 가령 초등학교 풋티의 경우 60점의 점수차가 벌어지면 이미 승자가 결정되었다고 보고 게임은 계속하되 점수판은 끈다. 지는 팀의 선수들이 사기가 꺾이지 않고 게임을 마무리하도록 배려한다.
5. 성평등을 추구한다.
운동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전에도 호주의 많은 여성들이 여러 종목의 운동을 했지만 축구나 야구처럼 남자들이 주로 하는 종목들도 있지 않은가! 호주 사회는 이런 벽을 깨기 위한 노력들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여성 풋티 리그도 활발하고 축구는 초등학교, 크리켓은 16살까지 남녀 혼성팀을 구성하는 경우도 많다.
6. 권위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이렇게 훈련과 시합을 하다 보면 팀마다 무수한 운영요원들이 필요하다. 대부분은 학부모나 지역의 자원봉사자들이 자리를 채운다. 채팅방엔 수시로 점수 계산할 사람, 물병 나를 사람, 심판 볼 사람이 필요하다는 게시가 오르고 일과 학업으로 바쁜 사람들이 시간을 쪼개 돌아가며 봉사한다.
아들이 하는 농구 게임의 심판을 보니 초등학생부터 칠순의 노인까지 다양했다. 선수들은 심판의 판결을 존중한다. 여학생이라고 비웃지도 않고 초등학생이라도 무시하지도 않는다. 성인 심판은 무료봉사인 경우가 많고 어린 심판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라 약간의 지불을 한다. 어릴 때 간단한 심판 코스 교육을 받은 뒤 실전을 뛰며 심판 경력을 쌓아간다. 그래서인지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최선을 다해 경기를 같이 뛴다. 한 번은 아들팀 코치가 판정에 불만을 느껴 초등학생 심판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주춤하기도 했다. '내가 이 어린애한테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정신이 퍼뜩 났을 것이다. 그래 봐야 코치도 20대 초반의 어리 청년이긴 하지만.
누구든 그 자리에 있는 동안 역할에 충실하고 자리를 벗어나면 다시 자신으로 돌아온다. 모든 역할이 유기적으로 변하니 누구도 제왕처럼 굴며 군림하지 않고 아무도 짓눌려 굴욕 당하지 않는다.
아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호주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이 현장에 녹아있는 정서를 이해하게 됐다. 한국의 교육현장 스포츠 현장은 어떤지 미래를 위해 고민을 해보면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