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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Jul 01. 2021

호주, 학교폭력-'피해자''가해자' 구분법

폭력 시작의 선을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

학교폭력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임에도 아직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하는 법이 모호한 듯하다. 종종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학교 선생님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하지 않고 ‘둘 다 잘못이다.’는 식으로 얼버무려 무책임하게 결론을 내리거나 가해자의 부모가 ‘아이들은 이러면서 노는 것 아니냐’는 항변으로 스스로를 방어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은 호주 사회에서 제시하는 간단하고 정확한 폭력 피해자 가해자 구분법을 소개해볼까 한다. 


아들이 다니는 호주 초등학교에도 왕따가 있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연령, 어느 집단이든 사람이 있는 곳엔 왕따가 있다고 봐야 한다. 단지 얼만큼 성숙하게 제도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해결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들 학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누군가 놀리거나 괴롭히거나 네가 싫어하는 행동을 할 때, 

  

무시하라(Ignore), 

피하라(Walk away), 

어울리지 마라(Not stay) 


이런 가르침에 대해 매우 실용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소극적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당장 폭력에 대항하기 어려우면 그저 조용히 자리를 피하라고 가르치는 것 아닌가. 언제까지 피하기만 해야 하나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좀 흐르고 거기엔 다른 뜻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피한다’는 행동은 내가 단지 무서워서 도망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는 지금 상황이 싫다’는 명확한 의사표시인 것이고 상대방이 이를 무시하고 계속 따라올 땐 이미 상대의 폭력이 시작됐다는 사회적 인식의 선인 것이다. 


아직도 ‘전치 몇 주의 진단서’를 뗐느냐를 놓고 폭력을 논한다면 그 사회는 폭력의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터럭 하나 건드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상대를 괴롭하고 아프고 귀챦게 할 수 있는데, 그 시작이 바로 내가 싫어서 그 자리에서 벗어났는데 상대가 같은 행동을 계속하며 따라붙을 때인 것이다. 그 행동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 일만으로도 피해자는 선생님께 바로 보고를 할 수 있고, 선생님은 ‘뭐 그런 일 가지고 피곤하게 구느냐’고 신고자를 책망하지 않는다. 당장 가해자를 불러 ‘상대가 자리를 피할 때 쫓아 붙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를 가르친다. 무엇을 했느냐는 이슈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이곳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자기 방어를 적절히 하는 편이고 공격적인 아이들의 행동도 계속해서 이어지며 악랄해지지 않는다. 분명히 거칠고 반사회적이며 그 아이의 처한 환경이나 부모의 성향을 봤을 때, 당장 개선될 여지가 적은 문제아들이 이곳에도 얼마든지 있는데, 차이점이라면 이런 작은 규칙을 설정하고 치밀하게 이행함으로써 이들의 행동이 수시로 중단된 다는 점이다. 분별없이 나쁜 행동을 하던 아이도 상대가 자리를 피하면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자기 행동을 멈춘다. 어떤 일들이 벌어질 듯하다가도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방어한답시고 같이 날뛰다 쌍방폭행으로 뒤집어쓰는 일도 없다. 폭력의 선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로 그을 것이냐를 놓고 매번 사안에 따라 의견을 나눈다는 것은 피곤하고 비생산적인 일이다. 


아들이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얼마 안돼 집에 오더니,”오늘 교장실에 불려 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물었더니 자초지종은 이랬다. 쉬는 시간에 학교 놀이터에서 노는데 4학년쯤 되는 형이 아들에게 소리쳤단다. “GO away (저리 꺼져)” 아들은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훌쩍이기 시작했는데, 그걸 지켜본 반 친구가 선생님께 보고를 했고, 곧 수업을 시작했으므로(담임은 수업으로 바쁘니까) 아이들은 교장실로 불려 가게 됐다는 것이다. 교장 선생님은 ‘네가 한 말로 인해 다른 아이가 상처를 받았으니 사과를 하라’고 했고 아들은 그 자리에서 사과를 받으며 상처를 회복했단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아들이나 그 아이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잘 어울리고 논다. 


그런데 그날 아들은 새로운 표현을 배운 듯하다. ‘엄마, 오늘 아무개가 내 마음을 아프게 했어요. He hurt my feeling.’ 아들은 종종 이런 표현을 하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아이의 무릎에 생채기를 봐주듯 아이의 마음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묻게 됐다. 그 정도 상처로 병원 갈 일도 아니고 약을 바를 일도 없지만 무릎이 깨져 피가 나면 엄마나 어른들은 한 번쯤 들여다 보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에도 수시로 작은 생채기가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데, 그걸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마음의 큰 병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때로는 분명히 아프지만 그 정도를 가지고 표현해야 하는지 마는지 혹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몰랐었는데, 아들의 일을 계기로 나 스스로도, 혹은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던 내 지나간 시간 속의 작은 생채기들을 이제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아픈 곳은 생기기 마련이다. 어디가 어떻게 왜 아픈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진단하고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2012/ 8/ 29 씀)


공군 여중사 성폭력 사고가 시끄럽다. 그녀가 성폭력이 일어난 차에서 내려 숙소까지 걸어가고자 했을 때 가해자가 따라 내렸다. 그가 사과를 했든 협박을 했든 차에서 내려 따라갔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폭력은 이미 선을 넘었고 그 결과는 참담할 뿐이다.  그 큰 조직이 이 만큼의 폭력에 제대로 인지하지 않고 침묵할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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