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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르미 May 24. 2021

나는 초딩과 결혼했다

지나가던 초등학생을 데려다 놓아도 이 사람보다는 낫겠다 싶을 때

  "언니, 그걸 꼭 말해야 알아요? 무슨 초딩도 아니고."

  결혼 10년 차 언니 1 : (무심한 듯 시크하게) "응, 말해야 알아."

  결혼 15년 차 언니 2 : (세상 다 산 표정으로) "말해도 몰라. 욕해도 잘 몰라. 그러니까 말이라도 해야지."


  남녀 불문, 결혼 초에는 컬처 쇼크가 종종 찾아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아이가 내 남편(아내)의 속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뭐야. 얘 무서워. 집안이 그지 꼴인데 어떻게 잠이 오지?'

  '어쩜, 설거지가 24시간 넘게 쌓여 있는데 치울 생각을 안 하지?'

  '지금까지 이런 밥은 없었다. 이것은 밥인가 돌인가. 뭐야, 밥솥 숫자가 99를 넘어서 다시 01이 됐어.'

  '왜 집안 곳곳에 뱀 허물이?'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배우자도 있을 수 있고, 상황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누구 잘못이라기보다는, 보통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하는 '네가 가라 하와이' 느낌입니다. 그래서 노력하는 사람이 더 억울해지는(?) 이상한 구조적 문제가 발생합니다.


  문제를 풀기 위해 조금 들여다보면, '집안이 그지 꼴'이라는 기준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결혼 전 내 배우자는 잔뜩 늘어놓고 그냥 곳곳에 징검다리처럼 발 디딜 구멍만 만들어 놓고 테트리스 하듯이 사는 사람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냥 독극물이나 깨진 유리 조각 같은 것만 치우면 사는데 별 불편을 느끼지 못합니다.


  기대하던 배우자의 모습이 아니어서 좀 놀랄 수는 있지만, 사실 이 기준은 선악의 기준은 아닙니다. 그냥 서로 라이프 스타일이 다른 문제고, 대화와 생활 습관 개선을 통해 얼마든지 나아질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소위 '스탠더드'를 선호하는 사회 특성상, 여기서 단추를 잘못 끼우는 부부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서로 자기의 '스탠더드'가 우리 가정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단 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느니 차라리 자기가 스스로 다 짊어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까지 배운 최대한의 '표준' 배우자 역할을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폭발합니다. 그다음에는 선과 악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정의의 수호를 위해 사랑은 실종됩니다. 그리고 집안의 그지 꼴이 가속화됩니다. 겉으로만 그지 꼴이 아니라 관계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집니다.


  자존심이 강해서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분들도 역시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걸 꼭 말해야 알아? 기가 막혀.' '말을 하려니 비참하고, 안 하려니 속이 터져 죽을 것 같고.'


  그러다가 어느 날 폭발합니다. (결과는 위와 같습니다.)

  

  나름 대화를 시도하려는 건강한 생각을 가진 분들도 역시 어려움을 겪습니다.


  '여보, 이것 좀.'

  '♪(콧노래를 하며 스마트폰을 한다.)'

  '(안 들리나?) 여보, 이것 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를 충실히 수행하며 나름대로 무언가 다른 중요한 것을 생각하는 중이다.)'


  특히 내 배우자가 스스로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 외에는 잘 들리지 않는 사람일 경우, 처음에는 대화를 시도하다가 점점 입을 닫게 됩니다. 그리고 화를 내는 빈도가 늘어납니다. 보통 먼저 화내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억울해집니다. 그럴 때 오가는 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버럭)"

  "아니, 왜 화를 내? 그냥 좋게 말할 수 없어?"

  "좋게 말하면 들어야지!!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화를 내면 어떻게 해."

  "화를 내는 게 잘못이야? 화나게 한 사람이 잘못이지."

  "(버럭) 나만 잘못했어?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한번 제대로 따져 볼까? 지난번에 너도..."

   (중략, 이하 무한 반복.)


  이런 대화는 한번 시작되면 계속 같은 패턴이 반복되기 쉽습니다. 마치 우유나 물 없이 고구마를 꾸역꾸역 먹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납니다. 전투가 잦아질수록 피로도가 높아져 예민해지는 한편,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정신 연령의 퇴행 현상(농담 반, 진담 반입니다.)이 찾아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퇴행의 대표적 증상인 언어능력 저하, 반복적 요구, 참을성 부족, 인지능력 저하 등의 증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서로 소통이나 공감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시야가 좁아지고 객관성을 잃어버립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서러워서 주기적으로 고개를 씰룩 거리며 힉힉힉 하고 우는 어린아이처럼 딱한 처지가 됩니다.


  그때 '우리'가 사실 '겉으로 보이는 만큼, 내가 생각하는 만큼' 어른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서로의 민낯을 다 보고 나서도 계속 어른인 체하며, 다른 사람들 보는 데서만 괜찮게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럴 때는 서로의 모습이 마치 초등학생 아이가 엄마 화장품을 진하게 바르고, 맞지도 않는 뾰족구두를 신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진짜 애들이 그러면 귀엽기라도 하지요.


  그러나 이제 정직하게 서로의 밑바닥을 보았고, 서로의 정체(초딩)가 드러났다면 과도하게 절망하거나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아직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어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쉬워지는 면이 있습니다. 어른은 보통 실수하면 안 되지만, 학생은 아직 배울 수 있는 특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삶은 정직합니다. 뭐든지 마음과 시간을 기울여 배우고 연습하면 좋아집니다. '자칭 어른'은 결혼 생활을 계속하지 못할 이유를 끊임없이 찾지만, 초등학생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부가 둘 다 어른이라면 금상첨화겠지요. 그러나 내가 어른이고 상대방이 초딩이라면, 조금 더 실수할 수 있는 기회도 주고, 여지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두 사람 다 아직 어른이 아니라면, 서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는 것이 공동선을 위해 더 나은 길입니다. 이것이 부부의 사랑입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부가 잘 사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비교적 서로를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어른의 대화'를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능하면 결혼 처음부터 부부가 서로 존댓말과 존중하는 어조를 사용하는 것은 적은 투자로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평생의 자산이 됩니다. 자녀들에게도 좋습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사용하는 존중의 언어를 통해 상대를 배려하는 법을 배웁니다.


  내가 보기보다 어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인간, 행복한 가정으로 가는 첫걸음일 수 있습니다.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배우고, 어른이 되어 갑니다. 안 싸우는 부부도 좋은 부부이지만, '잘' 싸우는 법을 연습하는 부부가 되는 것이 보통은 더 낫습니다.


  지은 죄가 많아서 제 글은 늘 기-승-전-반성과 자아성찰이네요. 여전히 저는 초딩으로 회귀할 때가 많지만, 오늘은 10년 동안 제가 주는 고구마 오만 팔만 개 정도 먹어야 했던 우리 집 평강공주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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