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생각이 나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자기는 그렇게 생각이 많으면서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았어?"

내 얘기를 듣던 아내가 물었다.

"생각을 잘못해서 그렇지. 음식 사진을 보고 열심히 생각만 해서 배가 너무 고팠지."

"이젠?"

"이젠 진짜 음식을 먹고 있지. 사진이 아니라 사진을 보고 배고픈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거든. 그러면 내가 배가 부르려면 사진이 아니라 진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거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없다."

"나는 있다."


이 말들을 이해할 수 있는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의식을 깨우기 위한 도구다. 자신이 기계적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라는 명령이다. 내 생각, 내 느낌, 내 판단, 이 모든 것들이 다 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깨달으라는 촉구다. 그래야 내 삶이 내 것이 아니고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내 삶이 지금껏 팍팍하고 답답하고 막막했던 이유는, 내 삶에서 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나는 없다는 말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말이다. 지금 내 삶을 지휘하는 나는 없다. 나는 단지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자리 잡은 프로그램에 의해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어디에도 내 생각은 없다. 내 삶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이 내가 없다는 말의 의미다.


나는 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이것은 두 가지 경우이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보통의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성실한 자기 탐구를 통해 삶의 주체로 거듭난 경우다. 후자는 기계적인 세계관에서 비로소 탈피해서 진정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이들은 직접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깨어나기 위해서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영적 스승인 마하리쉬는 문제에 매달리기 전에 그 문제의 소유자를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이 마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질문은 마하리쉬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한다. 우리의 의식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현상, 현상에 대한 생각, 현상에 대한 생각에 대한 생각이다. 우리는 보통 현상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문제에서 빠져나오려면 현상에서 벗어나 자기 생각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눈을 어지럽히는 현상은 사라지고 자기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자신의 시선을 수술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것이 자기 발견과 성장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 현상에 대한 생각이라는 쳇바퀴,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스스로에게 눈을 돌리는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