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사랑도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예전엔 정말 몰랐었다.
암이라는 것이 이렇게 다방면으로 사람을 못 견디게 괴롭힌다는 것을.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 주변의 건너 건너 누군가가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엔
'응, 힘들겠네.'라고 건성으로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었다.
타인에 대한 가방끈 짧은 내 표현력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금지된 사랑도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했듯이, 내가 직접 암과 만나니 힘들다는 정도가 말로는 표현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놈의 암 때문에 어느 날부터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남편이 암 진단을 받은 그 당시에 여름휴가철이어서 내 주변 사람들은 피서를 어디로 가야 할지 장소를 고르다가 부부싸움을 했고, 시댁 식구와 같이 가는 여행이라서 벌써부터 여행이 내키지 않는다는 등의 푸념을 자랑 질 할 때, 나는 지구별에서 알콩달콩 사는 지구인들 틈바구니에 어설프게 끼어든 낯선 이방인의 모습으로 평범한 지구인들 앞에서 내가 어떤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섰다.
어느 날에는 마트에서 남편의 아는 지인의 부인을 만났다.
넓은 마트에서 나를 발견한 그 부인은 당당한 걸음으로 반갑게 다가와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아유, 소식 들었어요. 자기 힘들어서 어떡해?"
"네에...."
'이런 젠장, 마트 바구니가 왕창 커서 내 모습을 좀 가려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아, 차라리 잠깐이라도 파리로 변신해서 저기 있는 쓰레기통 속에 꼭꼭 숨어버리고 싶다.'
그러나 이미 우리의 주변 사람들에게 남편이 췌장암 환자라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지구를 떠나기 전에는 마땅하게 어디로 숨을 곳도 없다.
지구인들은 처지가 달라진 나를 보며 한 마디씩 위로의 멘트랍시고 품평을 한다.
"많이 말랐네. 마음고생이 심하지?"
"왜 하필 췌장암이래?"
"그래, 힘들지?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 거야? 당장 남편 수입도 없어졌잖아."
"........"
이때부터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하지 못해서 어금니를 깨무는 버릇이 생긴 것은.
물론 나는 다정함이 지나친 살가운 지구인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는 했다.
"야, 이 십장생아. 네가 나라면 내 남편이 암에 걸려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 이 판국에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 건지가 그렇게도 궁금해? 나는 하나도 안 궁금한 그것을 댁이 왜 궁금해하고 난리야?"라고 여유만만 쏘아 부치고 싶지만 나는 또 어금니를 깨물고 참는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음부터는 누군가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차라리 아는 척을 하지 말자.
힘드냐는 멘트도 영혼 없는 위로도 쓸데없이 지껄이지 말고 말없이 신사임당이 그려진 신권을 두툼하게 건네주며 위로를 대신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