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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돌 Nov 13. 2023

고2 때 그녀를 만났다

1.1. 금      


어제는 영길이네서 망년회를 했다. '87년 최후의 만찬치고는 너무나 초라했다. 막걸리 한잔하고 반을 마셨다. 머리가 핑하니 돌았다. 어른들은 이런 상태를 거나하게 취했다고 하는가. 새삼 술에 대해 정의를 내려본다. 술은 환각증세를 일으키는 마약이다. 나는 결코 술이나 담배에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올해는 무진년 용의 해다. 아쉬움과 절망을 보내고 희망과 기대를 가져본다. 이 세상에 가장 평등한 것이 나이와 죽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태어날 때 죽음을 선고받는 것과 같이 누구나 1년이면 한 살이라는 나이를 먹고 생로병 하다가 마침내 사한다. 자기가 원컨 원치 않건 말이다.      


작년의 가장 큰 행운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그녀를 만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녀는 하얀 피부가 흰 나리처럼 이뻤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해맑게 웃는 모습은 내 심장을 멎게 했다. 기도드린다. 그녀와 잡은 손을 놓지 않게 해달라고. 


그리고 고3이 되는 새해에는 모든 일에 진실했으면 좋겠다. 또 엉킨 매듭을 풀 때 가까이 있는 매듭부터 하나씩 풀어나가는 현명한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대학에 꼭 합격해서 멋진 대학생이 되었으면...          



1. 2. 토


용인에 사는 큰누나가 집에 왔다. 어머니는 큰누나한테 대학을 보내 줄 형편이 안 되는데도 대학에 가겠다며 떼를 쓰는 홍엽이 때문에 걱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큰누나는 내편이었다. 나를 옹호했다. 어머니한테 김 씨 가문의 장손인 홍엽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눈시울이 젖어왔다. 


아버지가 대학은 무슨 대학이냐고 내게 호통을 친 것이 엊그제였다. 나는 그래도 속으로 부르짖었다. 나는 죽어도 대학에 갈 것이라고.


큰누나의 마지막 말이 심금을 울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친구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했다. 거기에 동요하거나 동화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1.4. 월     


늘 집에 들어올 때는 가슴이 설렌다. 그녀의 편지가 기다려지기 때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우편함을 열었다. 그녀한테 편지가 와 있었다. 너무 기뻐서 내 마음에는 어느새 잔잔한 물결이 일렁였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작년 시들어가는 가을 오후였다. 그때 나는 힘든 내 마음을 불교에 의탁하고 싶었다. 청년법회에 갔을 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녀의 편지를 요약해 보았다. 사회 속에서 숱하게 발견되는 부조리, 진실은 허영이다. 자기 합리화, 세상에서 발견되는 모순점에 슬프다는 다소 비관적이 내용이 스며 있었다. 그런 사회적 부조리들이 이번에 고1로 올라가는 여학생이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버거워 보였다. 


1월 2일 지은 시 한 편을 적고 그녀한테 편지를 썼다.    



노을     


붉어서 살아있다

피를 토하듯 오열하는

그 숨결을 누가 알라마 난

퇴색해 가는 가을 저녁 하늘 

너는 어김없이 하늘을 갈짓자로 

걸어서 찾아왔다

눈처럼 순결한 사랑이라면

별처럼 영롱한 진실이라면

사람들 가슴에 잊히지 않는 기억이나 되지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붉은 울음을 토하고도

산산이 부서져 눈만 슴벅이는 노을이여

서러움에 함묵하며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벌레 먹은 늙은 장미의 아픔을 

이해하기도 전 

이미 향기를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가을빛 물든 언덕에 서서

붉은 기침을 토하는데

누워 앉아 저리 붉은 초상화를 그리는데 

너는 그렇게 붉어서 살아있다          



1.7 목     


수학 보충수업이 1시에 끝났다. 방학에도 학교에 나오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국어선생님이 교정을 봐달라고 해서 교무실에 갔다. 1학년 송익이가 먼저 와서 교지 퇴고를 보고 있었다. 점심과 저녁은 선생님께서 자장면과 볶음밥을 시켜 주어서 먹었다. 또 수학선생님은 봉봉을 주셨다. 


교지 교정을 끝내고 안양 지하상가 석병이 형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갔다. 그 형은 열심히 엽서와 카드를 팔고 있었다. 그 형과 대학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도 그 형처럼 내년에는 멋진 대학생이 될 수 있을까.           


1.10. 일


아버지는 거나하게 취해 불콰해져서 돌아오셨다. 이런 날은 세상사는 것이 싫다. 까뮈는 그의 작품 시지부스의 신화에서 자살에 대해 이렇게 피력했다. 


- 자살, 이것은 인생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행위다. 


얼마 전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자살에 대해 현실 도피라고 말을 했었다. 다 맞는 말이다. 



1.13. 수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매일 아침 5시에 과천도서관에 간다고 했다. 나 자신이 초라해 보인다. 나는 오늘도 6시 반에 일어났다. 



1.14 목     


집에 오니까 그녀한테 편지가 와있었다. 나를 위해지었다는 ‘길동무’ 자작시가 동봉되어 있었다. 얼마 전 깊은 밤에 그녀와 함께 시 외우기를 한 적이 있다. 나도 문학 소년을 꿈꾸었기에 그녀한테 뒤지지 않을 것이라 자신했다.      


그런데 내가 첫 번째로 외운 시가 윤동주의 ‘서시’였던 반면, 아직까지 중3인 그녀가 외운 시는 장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였다. 나직이, 그러나 낭랑하게 낭송하는 ‘목마와 숙녀’의 마지막 구절인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라는 대목에서 나는 울컥했고 그 시에 철저하게 함몰되어 갔다.  


사실 나는 학교에서는 문학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까지 교과서에 나오는 시와 시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다 외운다는 것조차 친구들은 모른다. 그런데 그녀 옆에서 나는 신명 나게 내가 좋아하는 시를 외우고 있다. 그녀와 시 외우기는 30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결국 무승부로 끝이 났다.


그녀가 보낸 자작시 ‘길동무’는 시적 기교를 떠나 그녀의 바람을 대변하고 있었다. 나한테는 과분한 시였다. 문득 이 시를 읽어 내려가면서 정작 그녀에게 내가 그녀가 말한 ‘길동무’가 될 수 있을지, 또 내게는 그럴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길동무     


말없이 흐르는 고요한 강물처럼

피어오르는 숱한 사연들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싶었다. 


하얗게 부서지면서 울고 싶던 내게

새하얀 긴 터널의 흐름에서

진실을 알련 준 당신은

차가운 새벽안개 속의 엷은 햇살이었다    


나직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시간은 멎어 버렸고

내 마음은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은 행복의 세계로 인도하였고

그 속에는 슬픔도 사라져 버렸다     


진실로 새겨진 당신은

차가운 바람과 밤의 어둠 속에서 

내 영원의 길동무였다. 


'길동무'를 읽으면서 문득 사려했다. 앞으로 그녀와의 사랑은 어떻게 흘러갈까. 정작 그녀가 생각하는 멋진 길동무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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