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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돌 Nov 20. 2023

젊은 우리 사랑은 어디로 흘러갈까?

젊은 날의 사랑은 그렇게 꿈을 키웠다


1988. 1. 15 금     


집에서 정다운 스님의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을 읽고 있을 때였다. 앞집에서 ‘아랫집 학생, 전화 받어’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행여 나는 그녀의 전화가 아닐까라는 설렘이 먼저 앞질러 간다. 나는 맨발로 수돗가를 지나 앞집으로 달려갔다. 마룻바닥  작은 상 위에 검은 전화기 수화기가 내려져 있었다.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국어 선생님인데 내일 교무실에 와서 교정을 볼 수 있어?


내일 학교에 와서 마지막 교정 보는 것을 도와달라는 국어선생님의 전화였다. 나는 '네'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내가 기다렸던 것은 그녀의 전화였다. 



1988. 1.19 화     


얼마 전 그녀를 만났을 때 새벽에 일어나 과천도서관을 다닌다고 했다. 게으른 나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녀와 함께 도서관을 다니기로 약속을 했다. 


오늘은 그녀와 첫 도서관을 가는 날이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부산 피웠다. 새벽을 깨우는 신새벽은 안개에 깔려 있었다. 5시에 과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직행버스가 군포의 정류장에 멈추어 섰을 때 그녀가 승강장에 서있었다. 차창 밖으로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수줍은 듯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녀는 해맑은 웃음과 함께 우표처럼 얌전하게 버스에 올랐다. 


하얀 블라우스 위의 순백의 얼굴, 거기에 흰 나리처럼 날리는 웃음, 그녀의 목소리가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5시 30분 과천도서관에 도착했다. 내 번호는 425번, 반월에서 첫차를 타고 왔는데도 내 앞에 400여 명이 줄을 서 있었다. 


나도 언젠가 저들처럼 일찍 도서관에 도착해 보고 싶은 욕구가 물결쳤다. 하지만 반월에서 첫차가 5시 버스이기에 일찍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6시부터 번호표대로 입실했다. 그녀와 구내매점에서 만난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그녀와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나는 김을 싸왔고 그녀는 오뎅을 싸왔다. 구내식당에는 오뎅국물을 50원에 팔았다. 하나 시켜서 그녀와 같이 나눠 마셨다. 한 겨울의 추위를 잊게 해 주는 오뎅국물이었다. 


도서관에서 그녀 친구 한심명이라는 아이를 만났다. 성격이 쾌활했다. 연합고사에 떨어지고 후기를 준비한다고 했다. 



1988. 1.26. 


집에 왔을 때 그녀의 편지가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방에 들어와서 가위로 조심스레 귀퉁이를 잘랐다. 예전에 교무실에 갔을 때 선생님이 편지를 가위로 잘라 읽는 것을 보았다. 멋있어 보였다. 그 후로 나도 그녀의 편지를 자를 때는 가위로 정교하게 자르는 습성이 생겼다. 


그녀는 오빠가 말한 것처럼 관포지교나 백아절현에는 우리의 우정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믿고 살자고, 속더라도 믿고 살자고 이 말을 다시 인용했다. 그녀는 그렇게 살자며 손가락을 걸자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내 아랫묵에는 우정이 아닌 사랑으로 전이되어 오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까.  


또 편지의 내용 중에 산다는 것은 곡예사의 줄타기처럼 늘 아슬아슬하고 그 속에 삶을 뒤돌아보면 정에 굶주려 왔다는 내용 앞에서는 갑자기 울컥해져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는 글귀도 있었다. 문득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가 작년,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허망하게 시들어져 가던 가을 오후였다. 나는 그 당시 공고를 다니면서도 대입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과 후에는 한샘학원에 국영수 강의를 들었다. 과외가 불법이었지만 공고생인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인문계 아이들도 대부분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학원 수업을 듣고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마지막 예습을 한 후 그곳에서 새우잠을 청했다. 


내가 그렇게 대입에 지쳐가고 있을 때, 그녀를 만났다.  나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안양에 있는 구인사를 찾았다. 그 당시 나는 정다운 스님의 '위대한 침묵'과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을 읽으면서 불교에 관심이 있었고 친구는 부모님 따라 불교에 귀의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때 나는 고2였고, 그녀는 중3이었다. 그녀를 처음 법당에서 보았을 때 백설처럼 고운 피부가 은근히 시선을 끌었다. 그 후 나는 솔직히 종교적인 깊이보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매주 토요일 오후 법당을 찾았다는 고백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그녀와 힘께 대화를 나눌 시간이 주어졌다. 


- 중3이면 한창 연합고사 준비해야 할 시기네.

- 네에, 그래요. 근데 특별히 갈 고등학교가 없어요. 반에서 1, 2등 하는 아이들이 들어가는 A 고를 못 들어가면 어디를 가죠?

- 음... S여고도 있고 Y여고도 있고...

- 그 학교는 중간만 해도 들어갈 수 있는 여고잖아요. 우리 부모님이 그러는데 거기 졸업해서는 좋은 대학 가기 힘들대요. 


그녀와의 대화는 약간 저돌적으로,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함부로 근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이었다. 


- 참, 같은 김씨네요. 본관이 어디냐고 물어봐도 될까요?

- 경주김... 

- 어머, 나도 경주김인데, 오빠뻘 되네요. 


그리고 두 번째 만남은 군포사거리였다. 나는 법회가 끝나고 군포사거리에서 반월 가는 6-1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서 우연찮게 그녀와 맞닥뜨려졌다. 대지에는 겨울을 알리는 찬 바람이 공평하게 태동하고 있었고 그녀는 겨울을 대비하여 완전무장한 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비해 나는 잠바도 없이 긴팔에 하얀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냈을까. 그녀는 목에서 머플러를 풀더니 내게 건넸다. 안쓰러운 듯 나를 바라볼 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플러를 보는 순간, 사실  내 가슴에는 맑은 샘물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나마 그 머플러가 사랑의 교두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머플러를 받으면 다음 주에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도리질을 하고 말았을까. 내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괜찮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말았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멀거니 도로에 시선을 붙박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 우리 빵 먹고 갈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넌지시 바라보며 앞에 있는 빵집을 가리켰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아래로 주억였다. 우리는 사거리 허름한 빵집에 들어가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날 에세이 작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 유안진 작가는 문체가 화려하지 않고 편안해요. 읽어도 이해가 쉬워요.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과 '지란지교를 꿈꾸며' 같은 에세이가 대표적이에요. 김남조 작가는 필요 이상으로 한자나 어려운 단어를 남발해요. 일상생활에서 쓰지 않는 말들요. 아마 조선시대에나 쓸법한 단어들 이예요. 안병욱작가는 철학가잖아요. 그래서 에세이도 철학적이에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그렇구요.


그 후 그녀와 만남은  자연스레 시나브로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불교 청년회에서는 소백산에 이 있는 총본산 구인사로 4박 5일 청년 동계수련을 떠난다고 했다. 나는 처음에 수학 보충수업으로 참가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흔들렸다. 왜냐하면 그녀도 동계수련에 간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내가 동계수련을 가기 위한 복안으로 수학보충수업을 취소한다고 하자 선생님은 이미 신청을 했기에 취소가 안 된다며 내게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대입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보충수업을 취소할 수 있냐며 심한 꾸지람까지 늘어놓았다. 하지만 결코 나는 그녀와 동계수련 가는 것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소백산에서의 4박 5일, 나는 늘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녀와 함께 아침과 저녁으로 예불을 드리고 하루 세끼 공양을 같이 했다. 아침이면 그녀와 함께 적멸궁을 올랐고 오후에는 그녀와 함께 경내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서 독서토론을 했다. 


그리고 밤에는 그녀와 문학과 인생을 나누었다. 소백산 그 깊은 심연에는 별들이 유난히 총총히 빛났다. 별들은 한 폭의 아름다운 꽃이었고 그래서 밤하늘은 별들의 꽃밭이었다. 그녀와 나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수많은 시를 읊조렸다. 박인환의 '얼굴' '목마와 숙녀' 김소월의 '초혼'이 대표적이었다. 


4박 5일 동계수련을 마치고 귀가할 때도 내 옆에 그녀가 앉았다. 우리들 무릎 위에는 내 겨울옷이 덮여 있었고 그 속에는 아무도 모르게 그녀와 내 손이 마주 잡고 있었다. 몇 시간을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손을 꼬옥 잡고 있으면서 가정사나 미래의 희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1988. 2.4 목요일      


국어 선생님한테 동인문학상 1회 수상작 소설집을 '바비도'를 선물로 받았다. 늘 책을 선물 받을 때는 기쁨에 떨린다. 지난번 교정을 봐준 고마움의 표시인 것 같기도 했다. 동인문학상의 '바비도'는 현실의 괴리감도 있었지만 생존을 떠난 종교의 이단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사실 교정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한자를 교정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교정지에 실을 한문 선생님의 작품이 있었는데 한자가 태반이었다. 선생님이 한자를 잘 아냐고 내게 물었을 때 나는 잘 모른다고 했다. 선생님은 뜬금없이 한자를 佛敎 한자를 보여주더니 읽어보라고 했다.  내가 ‘불교’라고 읽자 선생님은 ‘됐어. 이 정도면, 한자는 직접 봐도 되겠는 걸' 이게 끝이었다. 


선생님은 단순히 불교 한자에 의존해서 내 한자능력을 척도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한자에 젬병이었다. 



1988. 2.19 금 맑음     


후배 현충이한테 전화를 받았다. 현충이는 내 고등학교 1년 후배다. 안면도에 사는데 겨울 방학 때 놀러 오라고 했었고 우리는 거기에 동의했었다. 내일이면 그녀와 함께 충청도 안면도로 2박 3일 여행을 떠난다. 현충이의 시골집이다. 


여행은 늘 설레임으로 가슴을 흔든다. 게다가 좋아하는 그녀와 함께 하는 여행은 어떤 향기로 날릴지 벌써부터 심한 정감이 파도친다.  

    

그녀와 바닷가에서 손 잡고 찍은 사진 - 그 당시 사진을 복사해서 일기장에 붙여 놓았다



1988. 2.20 토 맑음     


우리는 수원역 광장에서 만났다. 역사에 내려가 플랫폼에서 안면도행 기차를 기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우연찮게 전주병 화학선생님을 만났다. 전주병 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다 안 다는 듯 검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껄껄껄' 웃었다. 나도 '후훗' 웃어주었다. 


선생님은 내 옆에 있는 그녀를 보고 어느 학교, 몇 학년이냐고 물었다. 나는 명문고인 과천고에 합격했다는 것을 무슨 자랑삼아 펼쳤다. 선생님은 싱긋 웃더니, 여학생들이 착해 보인다며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좋은 추억 많이 만들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역시 멋진 선생님이었다. 


통일호 좌석은 크지 않았다. 둘이 앉는 의자였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 친구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 나란히 앉았다. 그녀와 내 살이 서로 엉덩이 옆구리 부분이 닿았다. 처음에는 움찔했다. 하지만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기차는 해안선을 따라 오래도록 달렸다. 녹음기에서는 이정선의 '섬소년'이 흘러나왔다. 


기차에서 내렸을 때는 저녁노을이 붉게 타고 있었다. 후배네 집은 버스를 타고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는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야만 했다. 버스에 내렸을 때는 후배 아버지가 경운기를 몰고 오셨다. 후배가 경운기 핸들을 잡았다. 


경운기는 비포장도로의 산길을 털털털 거리며 힘살 좋게 나아갔다. 경운기를 운전하는 후배의 모습이 정작 멋지게 보였다. 우리는 경운기 뒤에서 바퀴에 돌부리가 채일 때마다 연신 엉덩방아를 찧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서로의 입가에는 웃음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드디어 땅거미가 떨어질 무렵, 후배 집에 도착했다. 후배는 그의 어머니한테 그녀를 내 동생이라고 소개를 시켰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친오빠와 친동생이 되었다. 아니 그보다도 우리는 정말 친오빠와 친동생처럼 한방에서 잘 수 있었다.


후배 어머니가 개다리소반에 저녁을 차려왔다. 공기그릇에는 밥이 수북하게 올라왔다. 말 그대로 고봉밥이었다. 어촌이어서 그랬을까. 해초류의 반찬이 많이 있었다. 특히 맛조개를 넣고 끓인 된장국은 정작 일품이었다.   


후배 어머니는 군불을 지폈다며 사랑채 방 하나에 다섯 명을 밀어 넣었다. 알아서 자라는 것이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저녁을 먹고 잠자리를 정해야 했다. 옛날 시골집이 다 그렇듯이 군불을 지폈다고 하지만 아랫묵만 따뜻할 뿐 웃묵은 냉골이었다. 처음에는 남자들이 기사도를 발휘해서 그녀와 그녀 친구를 아랫목에 누이기로 했다. 


하지만 기사도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녀와의 사랑이었다. 나는 추위를 너무 많이 탄다며 그녀 옆으로 파고들었다. 후배는 어이없어했고 그녀는 싫지 않은 눈매였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심연 깊은 밤이었다. 불현듯 잠에서 깨었다. 그녀가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나도 몸을 뒤척였다. 그녀가 내 미동을 감지했을까. 나지막이 물어왔다. 


- 오빠, 잠 자?

- 아니, 잠이 안 와.

- 오빠 나도 잠이 안 와... 기분이 이상해지고... 이렇게 오빠와 함께 눕는 거 처음이잖아.


그날 밤, 그녀와 나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옆으로 누웠다. 캄캄한 밤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달빛에 반사된 것처럼 아슴푸레하게 밝았다. 희뿌염 속에서 이목구비가 명료하게 빛났다. 우리는 깊은 밤 둘이 손을 꼬옥 잡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 오빠 사랑에는 세 가지가 있대. 신에 대한 사랑인 아가페, 육체적인 사랑인 에로스, 그리고 정신적인 사랑인 필리아. 오빠 나는 오빠와 함께 필리아 같은 정신적인 사랑을 하고 싶어. 오빠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 오빠는 하얀 바지에 하얀 셔츠, 그리고 그 위에 하얀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그때 얼마나 하얗게 눈 부셨는지...


- 우리 기도할까. 지금 잡고 있는 손 영원히 놓지 않도록. 약속할게, 우리가 적막한 바다를 항해하다가 배가 난파된다 하더라도, 지금 이렇게 잡은 손을 영원히 놓지 않을 거야. 


-오빠, 나도.


서로가 조금씩 다가가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그녀와 내 얼굴은 거의 붙어 있었다. 모두들 잠이 든 깊은 밤에 우리 둘만 깨어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내 심장의 박동소리가 커져갔다.  유난히도 큰 그녀의 눈이 밤하늘의 별보다도 반짝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우리를 축복해 주는 것 같았다. 


문득 이 천사 같은 아이와 입맞춤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 가슴은 심하게 요동쳤다. 내 심장의 고동소리가 연신 커졌갔다. 그녀에게 물었다. 


- 나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래?


그녀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슨 부탁을 하려고 하는지. 고민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 가슴은 더더욱 요동쳤다. 할 말은 입가만 맴돌았다. 내가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망설이자 그녀가 물었다. 


- 오빠 뭔데?

- 음, 말을 못 하겠어. 

- ...

- 얘기할까?

- 응 오빠 얘기 해 봐.

- 나 있잖아... 사실은...


하지만 정작 입가에서만 맴돌았다. 아직 졸업식을 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어린 중3이었고 나는 고2였다. 하지만 그래도 남자가 칼을 들었으면 무라도 자르던가 아니면 동생 연필이라도 깎아주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 짧은 말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 나... 있잖아.

-...

- 나, 뽀뽀하고 싶어.  


아, 마침내 나는 그 말을 꺼내고 말았다. 사실 키스라는 말을 꺼내고 싶었으나 그 말은 너무 성인티가 나 보였고 순순성을 훼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뽀뽀는 고심 끝에 고른 단어였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그녀가 마주 보고 있던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리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그녀의 등이 보였다. 마음이 심하게 요동쳤다. 이것이 실연일까. 소위 말하는 차였다는 것일까. 나는 주체할 수 없었다. 부끄러웠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그 속에는 절망감도 밀려들었다. 심지어 그 말을 괜히 꺼냈다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나는 그녀의 등 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미안해. 

-...

-나는 다만.. 나도 모르겠는데...

-아니야. 괜찮아.


다행히 그녀는 화가 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안도의 함 숨을 쉬었다. 그리고 서로 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내게는 내일 어떻게 그녀 얼굴을 볼까 하는 근심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설핏 잠이 들었을 때였다. 그녀의 나지막한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 오빠?

- 응.

- 오빠. 그거...


이번에는 그녀가 말을 잇지 못했다. 꿀 먹은 벙어리였다. 마침내 그녀의 말. 나는 귀를 의심했다. 


- 오빠, 그거... 내가 해줄까?


아, 나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랑을 가졌어라. 내 가슴에는 한없이 맑은 강물이 흘렀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그녀가. 나에게 뽀뽀를 직접 해주겠다고, 지금 수줍은 듯 내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다렸다. 가슴에는 심한 격정이 두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심장소리는 숫제 북처럼 둥둥 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내 심장은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마침내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 헉, 나 못하겠어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내가 다시 용기를 냈다. 


- 내가 해줄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입술을 천천히, 그녀의 볼에 가져갔다. 그리고 그녀 볼에다 살짝 입을 맞췄다. 그다음 내 입술은 그녀의 입술 사이로 갔다. 그녀의 입술 사이가 벌어졌다. 마침내 그녀와 내 혀가 입 속에서 서로 만났다. 세상이 정지해 버렸다. 이 세상에는 그녀와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차마 부끄러워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침이 오지 않고 이렇게 세상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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