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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돌 Aug 14. 2024

무덤까지 가져갈 거예요



제목: 무덤까지 가져갈 거예요  


몇 년 전, 강원도 연곡 큰누나 집으로 휴가를 갔을 때의 일이다. 거나하게 술이 오른 큰 매형이 술잔을 목에 털어 넣더니 뜬금없이 말했다.      

‘처남이 학교 다닐 때는 공부도 잘했고 참 착실했지. 하지만 장인어른 돌아가셨을 때는 많이 실망했어.'

큰 매형도 어지간히도 서운함이 뼛속에 스며있었나 보다. 목젖마저도 붉게 상기되어 벌써 15 년이 지난 과거 기억을 곱씹고 있으니 말이다. 과거에도 몇 번 큰 매형이 내게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꺼냈고는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큰 매형의 기세는 한층 더 득의해지고는 했었다. 그런데 술이 올라서일까. 이번에는 나도 거기에 대거리를 놓았다.  

‘매형, 알아요. 매형이 그때 두 번 다시는 처갓집을 찾지 않겠다고 했고, 안산 땅을 보고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고 말한 것까지 알아요. 하지만 제가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그때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무덤까지 가져갈 거예요.'

내가 고개를 젖히고 단호하게 다분히 들으라는 투로 말을 하자 그 이야기는 묻히는 듯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또다시 두주불사 청탁불문이듯이 술자리가 이어졌다. 큰 매형은 초췌해질 정도로 많이 취했다. 노래방 가자면서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자꾸 뒷걸음질 쳤다.

그런데 내가 무덤까지 가져가겠다던 실체의 전말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그다음 날이었다. 소금강 계곡에 가서 어항을 놓아 버들치를 잡고, 밤에는 낚시 바늘에 지렁이를 꿰어 산메기를 잡도록 휴가일정이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밤부터 퍼붓기 시작한 폭우는 이튿날 점심이 되어도 기세가 누그러들지 않았고 결국 천렵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큰 매형, 작은 매형, 그리고 우리 가족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전부터 감자전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 같이 술에 용해되었다.      

특히 큰 매형은 연곡리 화장장 유치 추진위원장인터라 점심 무렵 마을주민들까지 찾아왔다. 혐오시설 입지에 따른 보상의 일환으로 정부에서 30억 원이 보상되는데 어떤 사업을 추진할 것인지 의견을 좁히기 위해서였다. 마을주민과 의견대립으로 술잔이 빨리 돌았다. 

마을 주민들이 돌아간 뒤에는 주문진에서 떠온 오징어회를 무쳐서 또다시 우리와 함께 술병을 기울이면서 많이 취했다. 그런데 술이 거나하게 오른 큰 매형이 돌연 작은 누나한테 ‘처제, 서울에 참한 처자 하나 없나? 언니 이제 바꿔야 되겠다.’ 하면서 직선적인 농조를 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매형, 나이 생각하셔야지요. 이제 꼬치도 잘 안 서요.’ 그러자 큰 매형은 아직 쓸만하다면서 ‘내가 30대에는 바람을 좀 폈지’ 하면서 지난날의 기억을 꺼냈다.  그 이야기를 듣자 가슴 한켠이 싸아하니 아려왔다. 무덤까지 가져가겠다던 실체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매형, 그 사건을 제가 모르고 있는 것 같지요? 다 알고 있었어요. 누나가 그로 인하여 약을 먹은 것 까지도...’

큰 매형은 내가 다 알고 있었다는 말에 시신경이 눌렸는지 아무 말이 없었고 큰누나는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홍엽이 네가 어떻게 아니? 그래서 아버지 장례 때 네가 매형한테 그렇게 했구나.’ 하고  큰 누나는 지난이야기를 술회하기 시작했다.  

‘그때 농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잘못 알고 쥐약 두 봉지를 먹었어.’하면서 지난 아픈 날을 떠올렸다. 수원에서 매형을 만나 결혼을 하고 매형이 수원 살림을 정리한 후 강릉으로 간다고 했을 때 서울을 떠나는 것이 싫어 많이 울었다고 했다. 대관령에서 산나물을 채취해 강릉 시장길에 좌판을 깔아 쭈그려 앉아 팔다가 서울 가는 버스만 봐도 울컥 눈물짓는 삼매에 빠졌다고 한다.   

큰 매형이 몇 년 동안 두 집 살림 차린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슬픔이 목울대에 차올랐던 것보다 더 이상 부질없는 삶을 연명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약국마다 돌아다니면서 수면제 열 알을 모았고 쥐약 두 병을 샀다고 했다.      

자살을 기도한 날, 가장 이쁜 옷으로 갈아입고 큰 매형한테 강릉에서 제일 전망이 좋고 비싼 라운지 레스토랑을 데려다 달라고 했다. 강릉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라운지에서 칼질을 한 후 살림집 옆에 있는 매형 사무실로 왔다고 한다.      

누나는 먼저 집에 들어가서 자라고 오늘만큼은 여기 소파에서 자겠노라고 고집했다. 누나가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자 어쩔 수 없이 큰 매형은 옆 건물 슈퍼가 있는 살림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잠을 자려고 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불길한 기운이 감돌아 사무실로 다시 왔다고 했다.      

큰 매형이 문을 따고 사무실에 들어가 누나와 수돗가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 누나는 이미 수면제 열 알과 쥐약 한 병을 다 마시고 두 번째 쥐약병을 비우고 있었다.

그날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 의사는 줄줄이 소시지처럼 매달린 강낭콩 크기의 물체를 임신했을 때보다 배가 더 많이 부풀어 오르도록 강제로 뱃속에 넣었다가 뺐다가를 반복했다고 한다. 의사는 토한 내용물을 보더니 ‘저녁도 아주 잘 먹었네’하고 지나가면서 말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각난다고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큰누나의 자살 미수 사건에 대하여 작은 누나로부터 들었을 때 그것은 내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같은 남자지만 큰 매형을 용납할 수도 없었고 용서할 수도 없었다. 스스로 남자라는 동물에 대한 회의를 느꼈고 내 마음속에는 비감에 젖은 분개만이 하염없이 끓어올랐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큰 매형하고 말 섞는 것 자체가 싫었다. 나는 아버지를 산에 묻고 오는 동안까지 큰 매형의 말에 끝까지 일언반구 가타부타도 대꾸하지 않았다. 큰 매형에게는 큰 누나의 자살미수에 대한 정한이 가슴에 옹이 깊게 응어리져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큰누나는 단순한 누나가 아니었다. 그 이상이었다. 내게 있어서 큰누나는 어머니였고 성자였다. 큰누나하고 나는 사실 배가 다르다. 큰누나는 피가 다른 아버지한테 온갖 구박을 받다가 결국 열두 살에 돈을 벌러 집을 나와 남의 집 식모살이와 그 당시 가장 천대받았던 미싱 공장을 전전한 그 누구보다도 불우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큰누나는 파스칼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남모르게 한 행동이 더 아름답다'는 파스칼의 말을 몸소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았다.  내가 일곱 살 때 이웃집 가계 주인의 닭이 헛간에 알을 낳았다. 훔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저 신기해서 손에 알을 집어넣었을 뿐이었다. 공교롭게도 계란을 들고 있는 모습이 가게 주인에게 들키고 말았다.

가게 주인은 나를 우리 집으로 데려갔다. 그날 하필이면 서울에서 미싱 돌리던 큰누나가 집에 온 날이었다. 가계주인은 큰누나한테 계란을 훔쳤다며 나를 나무랐다. 큰누나는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고, 가게 주인이 돌아간 뒤 큰누나는 아무 말도 없이 내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었다.

그때 큰누나가 흘렸던 눈물의 진실은 지금까지도 내 삶을 올곧게 이끌어 가는 이정표가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서울에서 온 큰 누나는 김치를 담겠다며 열무 2단을 사가지고 집에 왔다. 그런데 50원이 더 왔다고 다시 먼 재를 넘어 가계를 가서 50원을 돌려주고 오는 것이 아닌가.  그 후 내 좌우명이 하나 더 늘었다. 

- 모든 일에 진실하자, 그러면 그 삶은 보람되고 축복받을 삶일 것이다.        

나는 그 당시 부모님의 뜻에 따라 공고를 갔지만 대학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대학을 가지 못하면 내 인생은 담벼락처럼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내가 이 땅에서 올곧게 살아갈 자리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 당시 집안의 가정 형편도 모르는 이단아였다.

그런데 큰누나는 집안의 이단아인 나를 두둔했다. 요즘은 대학을 나와야 사람이 된다면서 굶어 죽더라도 김 씨 가문의 장손인 홍엽이 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을 보내야 한다며 아버지를 설득한 것이다.  등록금을 못 내면 큰누나가 직접 내어 주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결국 큰누나의 집요한 설득에 두 손을 들었다.

나는 그 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침마다 도시락 세 개를 싸서 학교로 갔고 저녁에는 안양에 있는 함샘학원 종합반을 다녔다. 그리고 잠은 독서실에서 새우잠을 잤다. 매일 같이 책상 위에 엎드려 자는 것도 어느 순간부터 능숙해져 있었다. 결국 인문계를 나와서도 가기 힘든 서울 소재 대학에 당당히 합격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침묵해 온, 무덤까지 가져가겠다던 진실은 15년 만에 큰누나에 의해 세상밖으로 나왔다. 큰 매형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이제 처남을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 나도 가슴에 무거운 돌단 하나를 내려놓은 마음처럼 홀가분해졌다.      

이튿날 큰 매형은 화장장 유치추진위원장으로서 폐플라스틱을 융해해서 기름을 얻는 시설 건립과 잔반쓰레기를 발효하여 유기거름을 만드는 쪽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며, 어느 사업이 좋겠냐면서 내게 넌지시 의견을 개진해 왔다.      

나는 폐플라스틱을 융해해서 기름을 얻는 방식은 산업재산권은 받았다지만 검증이 안된 사업으로서 쪽박이나 대박 둘 중의 하나이고, 잔반쓰레기를 이용하여 퇴비를 만드는 부분은 혐오시설 유치에 따른 주민들 반발이 있겠지만 그래도 후자를 추천한다고 말을 했다.      

그날 밤 9시 넘어서 대전 집에 도착했고,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매형한테 전화가 왔다. '처남, 잘 도착했나? 묻는 말에는 평상시에 보이지 않던 정겨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2006년 여름휴가 갔을 때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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