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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돌 Aug 20. 2023

용머리해안, 그 장엄한 화산암(제주 2일 차)

제주를 읽다


숙소를 나온 시간은 9시 10분이었다. 내가 제주도에 엉겁결에 여행온 연유는 무엇일까. 제주도에 가면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심리였을까. 아니면 30년간 열심히 직장 생활한 내 인생에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술 한잔 사주고 싶어서였을까. 


제주 여행을 통해 허물어지는 나를 치유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 삶의 원소를 멋지게 조형하고 싶었다. 나름대로 제주에서의 세 가지의 기준도 세웠다. 첫 번째는 제주도를 원 없이 여행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원 없이 글을 쓰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원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이다. 


아침마다 송악도서관을 가기로 했다. 독서도 실컷 하고 그 전날 여행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오후에는 제주도 방방곡곡을 여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수고로웠던 내 인생에 맛있는 밥과 술을 사 줄 것이다. 


송악도서관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냉방이 빵빵했다. 게다가 이용시간도 08:00부터 22:00까지 자유롭다. 녹동도서관이나 고흥도서관은 점심시간과 저녁 시간에는 식사시간이라 자리를 비워줘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도서관을 나온 시간은 오후 2시였다. 하늘은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오늘은 안덕계곡을 여행하기로 했다. 안덕계곡은 제주에서 가장 물이 많이 나고 가장 경관이 뛰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제주여행에서 반드시 가야 하는 코스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늘 여행은 기다림에 설레어서 좋다. 안덕계곡 가는 길에 잔잔히 먹구름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먹구름은 보슬보슬 보슬비로 내리더니 어느 순간 후드득 내리는 소나기로 그 세기를 더했다.  재난문자에는 제주도 폭우주의보가 뜨고 있었다.

 

처음에는 게릴라성 폭우로 생각했다. 하지만 십여분을 기다려도 소나기는 멈추지가 않았다. 그런데 탐방을 포기하고 모슬포항으로 핸들을 꺾으면 비는 소강되었다.  다시 안덕계곡으로 향하면 소나기는 양철지붕을 때리듯 무자비하게 쏟아졌다. 이 무슨 조물주의 조화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국지성 폭우가 안덕계곡만 집중 포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포기하고 용머리해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는 길에 많은 할머니들이 꼬챙이 같은 호미를 들고 우르르 갯가로 몰려가고 있었다. 갯가에 도착한 할머니들은 무언가를 열심히 캐고 있었다. 저 할머니들이 무엇을 캐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할머니들 곁으로  다가가 호미 끝을 예의 살폈다. 할머니들이 캐는 것은 아무리 봐도 낯선 해초였다. 그런데 할머니들은 기껏 채취한 해초를 사정없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보니까 할머니들이 뽀는 해초는 갯바위에 기생하는 잡초를 뽑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야 톳이 잘 자란다는 것이다. 순간 할머니들이 먹을 것을 채취하리라 생각했던 내 짧은 소견이 부끄러웠다.   


사계리 용머리해안에 도착했다. 용머리 해안은 해안선을 이루는 절벽의 모양이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용머리 해안으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용머리해안 너머에는 산방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보문사의 제법 큰 불상이 유독 금빛으로 빛났다. 부처에 귀의하면 중생을 제도할 수 있을까. 그보다 나부터 먼저 제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머리해안 매표소로 갔다. 관람시간이 13:00~17:00까지다. 지금이 16:55분이니까 마감 5분 전이었다. 용머리해안은 설물 때만 관람이 가능하다. 내게 행운이었다. 5분만 늦게 왔어도 관람할 기회를 놓치 뻔 했다. 입장료가 2천 원이었다. 입장료를 지불한다는 것은 그만큼 볼 것이 많다는 것이다.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와 와이리 멋있노?' 먼저 가던 관람객들이 탄성을 자아냈다. 관람객들은 기암바위 장관에 매료되어 연신 핸드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내가 봐도 갯바위와 바다가 어우러진 한 폭의 수려한 그림이었다. 


바다에는 쾌속배가 질주하고 있었다. 저 배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저 배의 종착지에 도착하면 또 무엇이 있을까. 여러 생각의 갈래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해안에는 거북손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어느 외국인이 손아귀에 힘을 주어 거북손을 따는 것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거북손의 아귀가 세서 손으로 도저히 딸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거북손은 칼로 따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거북손 맛은 일품이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의하면 거북손에 대해 모든 양념이 필요 없는 맛이라 기술하고 있다. 


바위 물골 안에는 밀물 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검은 물고기가 유영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 물고기는 일부러 그 작은 영역에서 자신만의 굳건한 성을 쌓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물이 맑아 바닥까지 투명하게 다 보였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조각구름이 떠가고 화산암의 웅장함이 펼쳐졌다. 마치 앙코르와트 같은 이국의 땅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자연의 신비로움이 경이롭다.


관광객이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도록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위태위태하게 보이지만 실제 건널 때는 견고하면서 안전하다. 특히 직접 보면 자연적으로 만들었다. 


용머리 해안 출구로 나가는 길이다. 용머리 해안은 입구와 출구가 달라 지루할 틈이 없었다. 입구를 지나 걷다 후미져 돌아 걷다 보면 출구였다. 나는 저 웅장한 형상과 미학적 장관을 오십 중반이 되어서 목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행은 다리가 떨릴 때 가는 것이 아니고 심장이 떨릴 때 가는 것이라고 세인들은 말하는 모양이다. 


나오는 길에 '해녀의 집'에서 해산물 2만 원어치를 샀다. 마지막 떨이라고 많이 주겠다고 했지만 결코 많은 양이 아니었다. 용머리 해안에서 해녀가 2만 원어치 직접 썰어주는 해산물의 양을 봤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양을 많이 주는 것이 아니고 능청스러운 생색을 많이 주고 있었다. 나는 가타부타 일언반구 없이 주는 데로 받았다. 


용머리해안 인근에 있는 숙소를 잡았다. 혼자 왔다고 하니까 4만원을 받았다.  3층에 있는 숙소로 올라갔다.  테라스에는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테이블과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거실은 일반 모텔의 두 배 이상 넓었다. 내부는 더께 먼지 하나 없이 정갈했다. 


오늘 저녁은 숙소에서 먹기로 했다. 비록 편의점에서 파는 '혜자로운 집밥' 도시락이었지만 용머리해안 '해녀의 집'에서 산 해산물이 있었기에 충분했다. 해산물은 뿔소라 다섯 마리와 전복 한 마리, 멍게였다. 혼자 먹기에는 진수성찬이다. 


옆에 보이는 귤은 용머리해안에서 파는 못난이귤이다. 시식을 해 보고 혀끝에 닿는 달달함이 너무 좋아서 샀다. 주인은 직접 재배한 것이라서 싸게 판다고 했다. 5천 원어치 샀는데 양이 제법 되었다.   


위에 하얗게 보이는 술은 한라산 소주다. 너무 독해서 도수를 보려니 글씨가 작아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는 방법이 있다. 바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보는 것이다. 21도짜리 희석식 소주였다. 결국 독해 다 마시지 못했다. 


2차를 가기 위해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은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아래 있었다. 나는 '아사이' 맥주를 좋아한다. 아마 일본에 가서 마셨던 그 입맛을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한동안 일본 맥주 불매운동이 불어서 마시지 못했었다. 


땅거미가 깔리고 거리에는 행인들이 무질서하게 교차하여 지나갔다. 그리고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아슴프레 들리는 파도소리에 저물어가는 제주 바다를 묵상하는 일은 가슴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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