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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없지만, 싱가포르의 어느 멋진 날에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의 사랑을 떠올리며

by 황여울


싱가포르의 뜨거운 햇살과 무더위가 잠시 바람 뒤로 숨어버린 듯, 기분 좋은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집 안을 돌며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다. 맞바람이 불어와 에어컨을 켜지 않았는데도 시원했다. ‘아, 오늘 웬일이야. 아침 바람이 너무 좋네.’


인터넷으로 한국 라디오를 켰다. 내가 즐겨 듣는 클래식 방송은 한국의 오전 9시, 이곳 시간으로는 오전 8시부터 두 시간 동안 진행된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진행자의 목소리에 클래식의 고급스러움이 스며 있어, 아침이면 늘 즐겨 듣는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가 흘러나왔다.


도마를 꺼내 잘 익은 아보카도를 반으로 잘랐다. 노란빛 매끄러운 속살이 드러났다.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를 뿌려 그릇에 담고, 삶은 달걀도 함께 올렸다. 블루베리와 사과, 체리토마토를 곁들이고 커피도 내렸다.


늘 그렇듯 식탁에 앉아 신문을 보며 아침을 먹었다. 생상스의 바이올린 곡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부드럽게 내린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니, 행복한 마음이 차올랐다. ‘아침엔 무조건 커피지. 커피 너무 좋아.’


거실 창밖으로 맑고 파란 하늘이 펼쳐지고, 따사로운 햇살이 야자수를 비췄다. 라디오에서는 기분 좋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

김동규가 부르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였다. 가사가 참 예뻐 평소에도 즐겨 듣던 노래였다.


‘그래,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땐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도 사랑스럽게 보이지. 연애할 때,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을 때... 그때인 것 같아.’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결혼한 지 2년쯤 지나, 미국에서 남편과 단둘이 신혼을 보낼 때였다. 사실 우리에게 진정한 신혼은 늦게 찾아왔다. 결혼 후 한동안 시부모님과 시누이와 함께 시댁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낯선 집, 낯선 생활, 낯선 자리. 그곳에서 보낸 1년 반의 시간은 짧고도 길었다.


그러다 드디어 미국으로 떠났다. 처음엔 친정 오빠의 친구 집에서 잠시 머물렀다. 반갑게 맞아준 오빠가 무척 고마웠다. 첫날밤, 나는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눈을 떠보니 이미 점심 무렵이었고, 온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남의 집에서 이렇게 편히 잘 잤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도 오빠네가 사는 아파트에 자리를 잡았다. 낡았지만 햇살이 잘 드는 집이었다. 버석거리는 카펫에서 먼지가 나는 게 단점이었지만 내게는 궁전과 같은 곳이었다. 남편이 학교에 가면 나는 집안일을 하고, 장을 보고, 저녁을 준비했다. 저녁 식사 후엔 함께 수영장으로 내려가 별빛을 보며 수영을 했다. 하늘 위로 반짝이는 별들이 그렇게나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소파에 앉아 십자수를 놓다가 현관에 놓인 남편의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히 놓인 신발이 어쩐지 사랑스러워 보였다. “여보, 나 다녀올게.” “여보, 나 다녀왔어.”하며 신발을 신고 벗는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발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세상에, 남편의 신발조차 예쁘게 보이다니.” 그런 나 자신이 조금은 우습고 또 사랑스러웠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김동규의 노래가 그렇게 30년 전 신혼 시절의 나를 불러냈다. 나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현관으로 나갔다. 남편의 구두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전날 신던 구두였다. 매일 밤 닦아 반들반들 윤이 나는 구두엔, 숱한 날 출장을 다니며 애쓴 남편의 발걸음이 담겨 있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김창옥의 강연을 들었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남편과 30년 가까이 살다 보니 사랑은 설렘이 아니라 애틋함이 되었다.


이제 휴일 아침이면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굳이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여보, 동네 한 바퀴 걷고 간단하게 아침 먹고 올까?”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두 손을 잡고 걷는 길이 그저 행복하다.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이 가득했던 그날을 떠올린다. 가을이 오지 않는 싱가포르이지만, 높고 푸른 하늘은 10월의 어느 멋진 날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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