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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Feb 13. 2023

출근을 하고 싶다

출근을 하고 싶다. 그런데 갈 회사가 없다.


2월이다. 퇴사한 지 칠 년이 막 지났다. 이민을 고민하던 무렵에는 '쉬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십 년 넘게 쉬지 않고 일했는데, 취업부터 시작하여 세 번의 이직과 승진, 결혼과 출산과 육아까지 거쳤으니 격동과 고난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제발 좀 쉬라고 누가 등이라도 떠밀어 주었으면, 싶은 순간 이민의 기회가 찾아왔다.


말레이시아에 오자마자 며칠을 앓았다. 낯선 나라에서 적응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낯선 나라에 적응하는 것보다, 전업주부의 일과에 적응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6시 30분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도시락을 싸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준 후 집에 오면 8시 30분이었다. 시간에 쫓겨 부산을 떠느라 엉망이 된 부엌을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리면 9시가 되었다. 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9시면 늘 업무를 시작하던 시간이었는데, 오전 업무를 끝내고 길 잃은 사람처럼 불안하게 서성였다.


본격적으로 살림을 하기엔 실력이 너무 부족했다. 어디 가서 '전업 주부'라고 말하기가 창피할 정도였다. 다른 주부들처럼 밑반찬을 서너 개씩 뚝딱뚝딱 만들어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 놓고, 먼지 하나 없이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빳빳하게 바지와 셔츠를 다림질해 놓고 싶었다. 하지만 요리는 도통 늘지를 않았고 청소는 너무 힘에 부쳤으며 빨래는 성과도 매출도 없이 끝없이 반복되는 업무 같았다. 어제 세탁기를 돌렸는데 오늘 또 채워져 있는 빨래통을 보면 숨이 막혔다.


그중 가장 큰 난관은 요리였다. 인터넷만 봐도 레시피가 넘치는 세상이라지만 나는 몸과 마음과 손이 따로 놀았다. 하루 세 끼에 간식까지 메뉴가 겹치지 않도록 일주일마다 식단을 짰다. 할 수 있는 요리가 적어 식단을 짜는 일부터 고역이었다. 새로운 레시피를 몇 번씩 읽은 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그러는데도 성공보다 실패가 잦았다.

콩자반을 만들겠다며 팥을 삶질 않나, 호박전을 만들겠다고 썰어 보니 오이인 적도 있었다. 야심 차게 끓인 어묵탕은 너무 매워서 눈물 콧물 쏙 빠졌고, 숙주와 콩나물을 구분하지 못해 괴상한 숙주국을 끓이기도 했다. 변명을 하자면 말레이시아 오이는 돌기 없이 매끈하고 콩나물은 숙주처럼 통통하다.


(내 눈엔) 애호박 같은 말레이시아 오이. 만화에서 볼 법한 당근은 그냥 예뻐서.

 

그 와중에 내 가족 건강하게 먹이겠다며 기름 대신 물로 조리하고(?) 소금과 설탕을 거의 넣지 않았으며 조미료는 아예 쓰지 않았다. 겨울 없는 나라의 기생충이 무서워 채소류는 미지근한 물에 담갔다가 흐르는 물에 헹구고 정수기 물로 그 과정을 반복했다. 반찬 하나 만드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솜씨 없는 초보 주제에 이상이 높고 욕심은 많았다. 교정교열도 제대로 못 하면서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잡는 밀리언셀러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꼴이랄까. 잘되면 나쁠 것 없지만 욕심이 과하니 스트레스가 컸고, 실패할 때마다 타격을 받았다. 주부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잘하지도 못하는 일을 매일같이 애쓰며 엉망으로 하다 보니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가족들 보기도 민망했다. 이대로 한심하고 무쓸모한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건가 싶을 때, 함께 일했던 동료가 일을 맡겨 주었다. 너무 기뻤다. 익숙한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니 숨통이 트였다. 교정이든 원서 검토든 번역이든 뭐든 좋았다. 일을 한다는 구실이 생기니, 서툰 살림에도 면죄부를 얻은 기분이었다. 아무도 타박하지 않았는데 그랬다. 죄인 같았다.


그렇게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고, 2020년에 첫 번역서가 나왔다. 이후 네 권을 더 작업했다. 이대로 만족할 줄 알았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는가? 출근이 하고 싶어질 줄은. 취업은 할 수 없는 타국에서 윈도쇼핑 하듯 구직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두리번거릴 줄은.




출근을 할 땐 회사가 나의 에너지를 빼앗아 간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에너지를 뺏겼고 거의 항상 피곤했다. 하지만 지금은 빼앗길 에너지 자체가 없다. 생동하며 밀려오는 에너지도 없고, 그에 부딪쳐, 혹은 그와 뒤섞여 방출할 에너지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모든 것을 해 나가자니 마치 선사시대 동굴 속에서 홀로 벽화를 그리는 것 같다. 망망대해에 뗏목 하나 띄워 놓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울리는 전화벨도, 업무 협조도, 회의 호출도 없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의견을 나누거나 커피 한잔 권하는 동료도 없다. 업계 최신 뉴스를 공유하고 대책을 강구하거나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지 못하니 이대로 사방이 정지된 듯 고요하기만 하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사람들과 어우러져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며 저만큼 앞서가는데, 나 혼자 머나먼 남국의 땅에 남겨진 기분이다.


이번에 1500쪽 분량 소설 번역을 끝냈다. 반년 넘게 한 작품을 붙들고 있다 고개를 드니 한 시대가 훌쩍 지나가 버린 느낌이다. 고작 반년인데. 동굴 밖 세상은 얼마나 변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침대에서 열 걸음 걸으면 책상이다. 매일매일 침실에서 책상으로, 책상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다시 책상으로, 책상에서 침실로 간다. 걸음을 옮기며 생각한다. 출근을 하고 싶다. 누군가와 함께 생각을 나누고 열정을 공유하고 목표를 향해 달리고 싶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다.


그래, 매일같이 왕복  시간 지하철 타고 출퇴근하는  정말 힘들었지. 마감해야 하는데 시간씩 이어지던 회의도 괴로웠지. 한번 전화하면 절대 끊을 생각하지 않으셨던 선생님도 계셨지. 참을  없을 만큼 나를 몰아붙이던 불합리한  때문에 눈물 흘린 적도 있었지.

막상 출근하게 되면 몇 달 안 가 프리랜서 할 때가 좋았어, 할 게 뻔하지.


그렇게 꾸역꾸역, '프리랜서가 좋은 00가지 이유' 같은 항목들을 떠올린다.

출근을 하고 싶다. 하지만 출근을 하면 퇴근을 하고 싶고, 입사를 하면 퇴사를 하고 어질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열 걸음 걸어, 책상 앞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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