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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eong Feb 23. 2024

인간의 조건 2

내면을 채우는 것들

 정아네 집에는 세자매와 엄마, 네 명의 식구가 살고 있다. 올해 열여섯 살 된 정아의 가족은 특별한 사연이 있다. 세자매가 모두 엄마를 통해 태어났지만 아빠는 각각 다르다. 그래서 엄마를 중심으로 세 자매가 한 집에 살고는 있지만 자매들끼리 서로 서먹함이 있다. 

 올해 스물다섯 살, 첫째 딸은 그녀가 세 살 되던 해에 아빠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럽게 아빠와 헤어진 어린 딸은 아빠 찾으며 울었는데 그 모습을 본 주위 어른들도 함께 눈물을 훔치며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아빠, 엄마"라는 말이 아직 익숙해지기도 전 말을 배우며 한참 부모님 앞에서 어리광을 하며 귀여움을 받아야 하는 세 살 나이에 아빠를 잃게 되었으니 어린 딸은 얼마나 아팠을까! 사실은 딸의 아픔보다 그 딸을 보살피는 엄마의 슬픔이 더 컸을 것이다. 슬퍼하는 정아 엄마를 보며 주위 사람들은 재혼을 권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연이란게 그리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 터, 정아 엄마는 재혼 권유가 있을 때마다 뿌리치곤 했지만 사별한 남편의 기억이 점점 멀어져가던 어느날 두 번째 인연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녀의 두 번째 인연은 참으로 자연스럽고도 우연적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딸 아이가 여섯 살쯤 되었을 무렵, 정아 엄마는 아이을 유치원에 보내고 잠깐 동안 식당 주방에서 일 을 하게 되었다. 음식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손맛도 좋았던 정아 엄마는 시간제로 주방일을 돕는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이다. 한참 손님이 많은 점심때만 일을 거들었는데 그땐 배달 손님도 많아서 배달 아르바이트생들이 꽤 여럿 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 한명이 정아 엄마를 볼 때마다 웃음을 흘렸고 공손하고 부드럽게 대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그 총각은 그 식당 주인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외로운 정아 엄마에게 깍듯이 대해주던 총각과 부지불식간에 친분이 생기고 1년 가까이 지내다 총각의 청혼으로 정아 엄마는 사별한 남편의 딸을 데리고 식당집 아들 총각과 정식 결혼을 하였다. 총각은 외모에 비해 겸손하고 욕심이 없는 여자가 좋았다고 고백했단다. 총각의 주위 사람들은 뭐가 부족해서 재혼녀와 결혼을 하냐고 혀를 찼지만 정아 엄마 주위 사람들은 착하게 사니까 인복이 있다며 축복해 주었다고 한다. 사랑으로 맺은 두 부부는 그 누구 못지않게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고 다복하게 지냈다. 다른 남자의 피를 물려받은 딸 아이지만 살뜰히 살펴주는 따스함을 지닌 남자가 그리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아 엄마는 식당에서 만난 두번째 남자에게서 둘째 딸을 낳았다. 그 아이가 올해 열아홉 살이 되었다. 그런데 열아홉살이 된 둘째 딸도 채 첫 돌도 되기 전에 아빠를 잃게 되었단다. 더욱 마음 아픈 것은 온 가족이 해수욕장으로 피서 갔다가 피서지에서 익사 사고로 변을 당한 것이다. 




 정아 엄마는 성씨가 다른 두 딸을 데리고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재혼한 것을 수천번 후회하기도 했고 먼저 간 남편들이 자기 때문에 변을 당한 것이라고 자책하기를 수천 수만번 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남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죽고 싶어도 딸 둘이 발목을 잡아 죽을 수조차 없었다. 정신적으로 미쳐가던 정아 엄마는 집주인의 권유로 동네에 있는 교회에 나가 신도가 되었다. 딱히 신에 대한 믿음은 생기지 않았으나 정신적 위로가 되었고 교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슬픔을 조금씩 달래게 되었다.

 그렇게 여러 해를 지내오던 중, 기도를 많이 하시던 교회 권사 한 분이 신앙은 좋은데 경제력이 약해서 배우자를 만나지 못한채 지내는 노총각이 있다며 만나볼 것을 권했다. 하지만 정아 엄마는 결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잠재하고 있었기에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교인들은 정아 엄마와 노총각과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우회적으로 상황을 만들어서 결국 만남을 피할 수 없게 했다. 소개받은 것처럼 노총각은 참 순수하고 착한 남자였다. 정아 엄마에게는 과분한 남자였다. 비록 경제력이 약하지만 학식이 있는 남자였고 자신의 눈높이도 있어서 나이가 찰 때까지 혼기를 놓친 것이었다. 나이 40을 조금 넘긴 노총각은 정아 엄마를 보자마자 호감을 느꼈고 만나보자고 제안했다. 정아 엄마는 분에 넘치는 남자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서 만나다가 재혼을 결심했다. 세번째 남자와 재혼한 정아 엄마는 그 남자에게서 세째딸 정아를 낳았다. 그녀는 딸 셋의 엄마가 된 것이다. 그녀의 세 번째 남자는 대학교 전공과 관련없는 가구배송하는 일을 했다. 돈은 없지만 마음만은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정아"라는 딸의 이름은 아빠가 지어준 이름이다. "이정아!" 40세가 넘어서 얻은 둘도 없는 자신의 혈육인 셈이다. 그는 늦게 결혼하고 늦게 혈육을 얻은 만큼 늦도록 알콩달콩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원하는 것처럼 흘러가지는 않았다. 정아가 이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할 무렵, 정아 아빠도 세상을 떠났다. 그날따라 막히는 길을 뚫고 가구배송을 하느라 오토바이로 이동하던 중 미끄러져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응급실로 실려간 정아 아빠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세 남자에게서 각각 명씩 세 딸을 낳은 정아 엄마는 만나는 남자마다 비명에 사별을 하게 되니 자신의 팔자가 고약하다고 절망하였다.

  첫째 남편은 영신이 열여덟 살에 만난 눈에 반한 첫사랑이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연애질이나 한다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영신은 끈질기게 첫사랑 남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혼인도 하기 전에 덜컥 임신을 하였고 그 바람에 만삭의 몸으로 스무 살에 결혼식을 올렸다. 혼인하고 얼마 안 있어 첫째 딸을 낳았는데 훤칠하고 윤곽이 뚜렷한 남편을 똑 닮았다. 남편은 자상하고 유순하여 아내를 잘 도와줄 뿐만 아니라 딸을 살뜰하게 보살폈다. 첫째 딸은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해서 아빠랑 떨어지는 걸 싫어했다. 아이가 갓 돌을 넘겼을 때 영신의 첫째 남편은 직장에서 밤샘 작업하고 늦은 밤에 귀가하다가 졸음운전으로 마주 오던 트럭과 충돌하여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당시 영신은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영신은 직장에서 만난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남자는 총각이었지만 영신과 그의 딸을 품어주기로  마음먹고 영신에게 청혼을 한 것이다. 영신에게 두 번째 남편은 행운이었다. 착하고 성실한 남자였고 자신의 피가 섞이진 않았으나 영신의 첫째 딸을 진심으로 아끼고 귀여워하였다. 얼마 후 영신은 두 번째 남편에게서 둘째 딸을 낳았지만 영신의 남편은 첫째 딸을 더 챙기고 예뻐했다. 두 딸과 네 가족이 된 영신과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캠핑을 자주 다녔다. 특히 남편은 바닷가에서 캠핑하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세 여자들에게 자신의 수영실력을 뽐내기도 했고 잠수하며 깜짝 놀라게 해주기도 했다. 그가 익사 사고를 당한 날도 가족들과 캠핑을 즐기던 중 날벼락처럼 당한 일이다.

영신은 첫 번째 남편과 사별했을 때보다도 두 번째 남편을 떠나보내고 더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또 여러 해가 지나고 영신은 그녀가 다니던 교회 동료로부터 세 번째 남편을 소개받았다. 영신은 어린 두 딸을 홀로 키울 자신이 없다는 핑계를 앞세워 소개받은 남자와 세 번째 결혼을 했는데 세 번째 남자도 초혼이었다. 그는 미대를 졸업하고 가구디자인을 하다가 포기하고 가구배송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밖에 나가면 탤런트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었다. 그는 정아 엄마를 무척이나 사랑하였다. 정아 엄마는 셋째 딸을 낳고서 자신의 인생이 신의 은총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 하느님께서 자신을 측은히 여겨 멋진 남편을 보내주셨다고 믿었으며 세 딸과 세 번째 남편과 백년해로하며 못다 이룬 사랑과 행복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정아 엄마에게 하느님은 무심했을까? 세 번째 남편마저 가구배송을 하던 중 빗길에 미끄러져 죽게 하고 말았다. 그녀는 세 번째 남편마저 잃고 나자 하느님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하지만 그녀는 연속적인 상처와 실연 끝에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낳아서 함께 살아온 성인이 된 세 딸과 마주하면서 그녀는 여인으로서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았다. 비운의 세 남자와의 인연은 그녀의 아픈 과거로 떠올랐다. 세번씩이나 남자를 만나고 사별하고 아프면서도 남자에 대한 미련과 의존적이었던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떳떳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이 없는 어린 딸과의 생활은 자신의 내면을 단단하게 지킬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갱년기가 되어서야 자신의 내면을 자신이 아닌 남편으로만 채우려 했던 것이 헛된 추구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채우는 것은 오로시 자신의 몫이며 철저히 독립적인 자세로서만 가능함을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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