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늙은이를 데려갈라고 그러는가? 난 아무 데도 안갈랑게 뭔 말인지 나한티 말혀. 나가 눈도 안 뵈고 거동도 못허니께 멍텅구리로 아는 건 아니제?"
"아이고 어르신, 그런 말씀이 어딨어요? 어르신 거동이 불편하셔서 방문목욕이랑 다른 필요한 서비스에 대해 상의해 보려고 하는 거예요."
"요양보호받으시면서 불편사항은 없으셔요? 어르신!"
"우리 요양사 슨상님은 훌륭허니 날 잘 보살펴주니께 글랑 걱정허지 말어."
"네. 알겠어요. 어르신, 제 명함 놓고 갈게요. 혹시라도 자녀분들 다녀가시면 이 명함 드리고 필요한 문의사항 있을 때 연락하시라고 전해주셔요."
복지센터에서 방문한 직원이 다녀간 후로 금례할머니는 혼자서 덩그런 집에 남겨졌다.
매일 만나는 사람은 요양보호사가 유일하다. 친절한 요양사는 주말에도 가끔씩 다녀간다. 금례할머니집에 요양보호사 말고 다른 사람이 방문하는 일은 극히 드문 행운의 날이다. 금례할머니는 대나무숲이 우거진 대나무골 마을을 무척 사랑한다. 그녀가 나고 자란 곳이기도 했고 90세가 다 되도록 시집살이 15년 동안만 대나무골을 떠나 있었고 그 후론 다시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으니 70년도 넘게 지내온 고향 마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금례할머니는 눈을 감고도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찾을 수 있고,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소식을 한 귀로 꿸 정도다. 그렇다고 뉴스를 자주 듣거나 마을소식지를 구독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렇게 마을 소식에 귀가 밝은지 신기했다.
한 번은 금례할머니가 끔찍이 여기는 금례할머니의 장남 부부가 서울에서 내려와 하룻밤을 묵고 갔다. 장남 부부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이나 다녀간 방문객 한 명 없었다. 아들 부부가 방문한 그날은 주말이라 요양보호사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아들 부부가 다녀가고 이틀 후 요양보호사가 와서는 물었다.
"어르신, 아드님 왔다 가셨다면서요?"
"그건 어떻게 알았는가? 아들내외가 연락도 안 하고 와서는 슨상님께도 말하지 못혔는디"
"아랫집 상식이 할머님이 알려주셔서 알았죠. 금례할머니집에 아들 왔다 갔다고."
"에구, 그 할매는 앉아서 천리견이구먼! 그날은 아무도 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적막혀서 아들 내외도 이 동네 사람들이 살고는 있는 건가 의심혔당게."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에 마당에서 보니까 금례할머니집으로 들어가더래요. 그 집에 큰 차 가지고 오는 사람은 금례어르신 아드님뿐이라던데요?"
"그렇기사 허제."
금례할머니가 시집갔다 이 마을에 다시 돌아와 살게 되었을 때만 해도 마을은 시끌벅적했었다. 금례할머니가 1936년생이니 그 자녀들은 베이비부머 세대로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에 태어났다. 금례할머니의 장녀가 1958년생, 둘째 딸이 1960년생, 장남이 1962년생, 막내아들이 1964년생이다. 4남매를 키울 때 왁자지껄했던 이 마을이 인적이 드물어진 적막한 동네로 바뀌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난과 씨름하며 땅 파먹고 살아가던 1930~1940년대생 부모들은 농사짓는 일을 자식들에게는 절대로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식들한테 만큼은 소위 땅 파먹고 살지 않고 펜대를 굴리며 편하게 살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결심하고 결심했다. 땀 흘리고 고생하며 가난과 싸우는 일은 우리 세대에서 끝내야 한다고 이 마을 어르신들은 술자리에서든 빨래터에서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열심히 허리띠 졸라매며 자녀교육에 매진한 결과 자녀들이 서울, 수도권으로 대학에 진학하거나 공장으로 취업하여 마을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최소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녀들이 1차, 2차로 마을을 떠나기 시작해서 1970년대생 막내들까지 마을을 떠나가니 마을에 남겨진 사람들은 피땀 흘려 고생하시던 부모님들 뿐이었다. 40~50대 나이가 된 부모들은 모이면 자녀들 소식을 주고받으며 자식자랑 하는 낙으로 하루하루를 지냈고 남겨진 땅뙈기에 열심히 농사지어 자식들에게 올려 보내는 일을 즐겁게 여기며 살았다. 때론 부모님들이 불쑥불쑥 농작물을 보따리에 싸서 이고 지고 자녀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 마을을 떠나지 못한 자녀들은 인생 실패자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숙이며 살아야 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취업을 하지 못했음에도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판잣집에서 자취하는 친구와 머물면서 일자리를 알아보기도 했다. 타향살이로 고된 나날을 보내는 자식들의 일상에 대해서 부모들은 헤아릴 수 없었다. 그저 농촌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뿌듯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한때는 자식들이 마을을 떠나 성공하기만을 바라셨던 부모들이 80세~90세 나이가 되다 보니 마을은 적막해졌고 노인이 된 부모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니 한 집에 독거 어르신들만 살아가는 쪼그라진 마을이 되어버렸다. 어르신을 돌볼 인력이 절대 부족한 마을이 되었다. 그렇다고 너무도 빠르게 발전한 도시로 어르신들을 모시기엔 문화적응이 어려운, 아니 불편한 상황이니 자녀들 입장에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금례할머니만 해도 자녀들이 모셔가려고 해도 도시생활이 답답하고 낯설기만 하니 불편하다고 했다. 그래서 자녀들이 모셔가면 며칠 머무시다 "내 집으로 갈란다"고 하시니 자녀들은 난감했다. 아무리 교통이 발달했다고 해도 서울과 지방으로 부모님 안부를 위해 방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함께 사는 것이 답이지만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도시생활 적응이 힘들고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부모님 돌봄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렇듯 부모님과 자녀들의 생활이 격세지감이 된 까닭이 뭘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이 문제였을까? 질문해 본다. 작금에 고령이 된 부모를 돌보는 일이 자녀의 도리임에도 현실적 받침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