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사람
글 쓰는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마요. 제가 걱정된다던 전 애인이 해주었던 말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어딘가 병적인 부분이 한 군데 씩 있기 마련이고, 그것들은 안 그래도 힘든 저를 더 힘들게 만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한 요인은 잘 모르겠으나 전체 집단 단위에서 보면 그런 경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의 문학가들이 아니라 난세의 문학가들을 보면 더욱 그렇지요. 그들은 숭고함과 동시에 유약했으니까요.
한 친구는 예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아프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미묘한 변화도 잘 감지할 수 있어 예술을 즐길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갑상선 항진증처럼 호르몬에 직접 영향이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허리 디스크 같은 신경계 문제는 물론 경험을 통해 습득한 상처도 사람을 민감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일견 동의하였습니다.
우울한 사람을 곁에 두어도 될까? 그 친구의 말은 제게 이런 질문을 주었습니다. 저는 여태 우울한 사람이라고 피한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기 마련이고, 밝은 사람이 있다면 우울한 사람도 있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각자 다르게 태어나 다르게 자랐기에 다른 성격이 된 것인데, 그에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누군가에게는 우울한 사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 애인의 충고가 무색하게, 저는 글 쓰는 사람들 곁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우울하지는 않습니다. 또, 우울하더라도 그것을 남에게 들이 붓는 일은 또 별개이지요. 작가님들을 만나다 보면 그런 일도 자주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덮쳐오는 우울은 꽤나 버틸만 해서 지금까지도 잘 다니고 있습니다.
우울한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우울한 사람이 저지르는 일은 이따금 저에게 너무도 크게 다가왔습니다. 너무 피곤해 일찍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눕자마자 검은 정장을 입고 밖으로 나서야 했던 날이나, 새벽 두 시 반에 떨리는 목소리가 천천히 식어가는 것을 듣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전 애인의 충고가, 혹은 친구가 했던 분석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그들은 이미 우울한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들이었고, 제가 무얼 해서 도와준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전 애인도, 친구도 모두 예술을 사랑하는 친구들이었지요. 그리고 정말 힘들 때 제가 옆에 있어 주기도, 제가 힘들 때 그들이 옆에 있어주기도 하였습니다. 만약 서로에게 서로가 없었다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무섭습니다.
우울한 사람 중에는 사람이 필요한 이도 있습니다. 그것이 왜 자신이어야하냐고 반문하신다면 드릴 말씀도, 설득할 생각도 없습니다.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저는 우울한 사람을 계속 옆에 둘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시기가 있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