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나 내 뜻대로 되지가 않아
삶을 우연에 맡기는 것이 좋을까, 인과와 규칙을 따르는 것이 나을까? 일단 나 같은 도시 임금 생활자에게는 질서가 필요하다. 출근하는 지하철은 제시간에 도착해야 한다. 월급은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액수가 입금되어야 한다. 짧은 휴가는 차질 없이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하고, 전세 만기 날짜도 예정대로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제멋대로라고 생각해 보자.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만약 내가 통제까지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스마트폰을 위시한 우리의 일상생활이나, 다양한 소비 경험들은 마치 우리가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는 달콤한 느낌을 준다. 유튜브는 언제라도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무한히 보여주니, 도저히 끊을 수가 없다. 수십 개의 립스틱 중에서 내가 원하는 하나를 고르는 과정은 만족을 넘어 황홀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우연적이고 규칙이 없는 대상보다는, 명확한 예측과 통제가 가능한 것을 선호한다. 본디 인간의 뇌는 예측 기계이다. 그러다 보니 무작위를 잘 견디지 못한다. 애초에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이 똑똑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규칙, 인과, 질서를 추종하는 경향성 때문이다. 이렇듯 더 잘 예측하고, 더 잘 통제하려는 욕망에서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오늘날의 문명사회를 이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자연에 대한 통제 경향성에서 찾는 의견도 있다. 다만 여기에서도 재생산과 결정적인 불화가 발생한다. 임신-출산-육아 특유의 불확실성과 통제 불능성 때문이다.
심지어 의학마저도,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는 아주 적은 부분만을 예측하고 설명해 낼 수 있다. 산부인과 진료실에 앉아 있다 보면 하루에 적어도 수십, 많으면 수백 가지의 질문을 듣곤 한다. 하지만 내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다. 대체 언제쯤 임신이 될까? 아기는 정확히 언제 태어날까? 아무런 병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나? 분만은 문제없이 원활하게 진행될 것인가? 내가 속 시원하게 말을 못 하는 이유는 내가 개중 유독 무능한 의사이기 때문이 아니다. 출산은 역동적인 과정 속에서 모체와 태아가 서로 상호작용하기에 지극히 복잡한 계를 이룬다. 재생산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물방울 하나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예측하겠다는 야심은 아직까지는 망상에 가깝다.
나 자신도 임신 기간에 태아의 심장 이상이 발견되어 적지 않은 마음고생 했음을 책을 통해 조심스레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문제가 으레 그렇듯, 임신 중에는 확정적인 진단이나 즉각적인 치료가 요원하다. 그저 기다리는 것이다. 아기의 건강처럼 지극히 중요한 문제를 불확실한 채로 견디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특기가 아니다. 다만 임신-출산은 원래 이런 종류의 일이니, 어쩔 수 없다. 엄마가 의사여도 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물론 아기를 낳으면 이 '통제 불능성'은 더욱 눈에 잘 들어온다. 한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삶이라는 방정식에 새로운 변수가 추가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될지, 어떤 성취를 이룰지, 어떤 삶을 살지 내 뜻대로 결정할 수 없다.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지속적으로 견뎌야 하는 일이다. 스마트폰으로 원하는 영상을 보거나, 백화점에서 립스틱을 고를 때의 쾌적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정신력이 필요하다. 기술 문명, 소비문화에 익숙한 젊은 층에게 이것이 쉽지 않은 과제일 것이라는 것은 예상 가능하다.
당신은 자녀를 완성시키지도, 파괴시키지도 못한다.
자녀는 당신이 완성시키거나 파괴시킬 수 있는 소물이 아니다.
아이들은 미래의 것이다.
『양육 가설』- 주디스 해리스
언제부터인가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이 없어서'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완벽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통제 환상이다. 부모라는 존재를 너무 이상화하면, 기준이 지나치게 높아진다. 이 '완벽한 양육자'는 자녀의 삶에 예상되는 모든 장애요소를 제거하고 평탄한 삶을 선사해 줄 수 있다. 그것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이러한 시도가 오히려 아이들의 회복 탄력성과 유연함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적당한 좌절과, 사소한 실패 정도는 허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자녀들도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는 규칙과 예측이 좀처럼 통하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재생산에는 애초에 통제할 수 있는 요소가 적기 때문에, 더더욱 사회적 지지와 회복 탄력성이 필요하다.
이누이트족은 아이들에게 의도적으로 사소한 갈등을 유발해 사회성과 유연성을 기른다고 한다. 그들의 양육법을 살펴보면, 자녀의 삶에서 모든 불안정성을 강박적으로 제거하려는 우리의 모습과 대비되는 시사점이 있다. 출산도, 출산율도 절대선이 아니다. 다만 자녀를 낳고 기르는 총체적 경험이 어떤 방향성을 지녀야 사회 구성원들이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울지, 그것을 고민해 볼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