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칼들고 협박했냐?
최초의 경구피임약은 1960년대 미국에서 개발되었다. 그 이전에도 나름의 피임법이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여성의 입장에서 임신을 결정할 권한은 극히 적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여인들이 가족 계획에 대해서 아무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화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뾰족한 수가 없었을 뿐이다. 만약 자기 뜻대로 결정할 선택권과 방법이 있었다면? 마다했을 리가 없다. 본디 인간은 자율에 대한 욕구가 강하고,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종족이다.
저는 24세의 여자 입나다 지금 유급으로 종사하고 잇습니다. 그런데 유아가 있어 대단히 불편합니다. 금후 6-7년간 더 종사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입니다. 6-7년간 동안에 필요한 약이 업습니까. 약명과 약방을 하교하여 주시오. 그리고 약을 복용치안흐면 잉체할 수 있습니가.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출처 : 조선일보 1936.5.15. 석간 4면 <피임하고 싶다>
건강 상담 사연을 보낸 여성이 피임에 성공했을지는 의문이다. 옛날 사람들도 피임에 대한 욕구가 있었지만, 당대의 문화나 보건 수준에서 그리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기존 질서에 따라 짝을 지었고, 그러다가 임신하면 애를 낳았다. 이것은 아이가 살다 보면 자연히 어른이 되는 것과 유사한 삶의 흐름이었다. 그래서 임신과 출산은 개인적인 사건이기는 하지만, 개인만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았다. 반면 높은 성공률을 보장하는 피임법들이 발명된 이상, 아이를 낳는 것은 이제 당사자 간의 결심과 각오의 영역으로 급격히 바뀌었다. 불과 수십 년 사이 일어난 변화이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임신과 출산을 계획할 수 있게 해준 경구피임약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로 꼽힌다. 나 역시 이 고마운 약이 여러모로 인류를 진일보시켰다고 생각한다. 다만 결정권이 커진 만큼 부모의 개인적 책임도 비대해졌다. 특히 임신이 ‘스스로 내린 자율적 결정’이라는 점에 착안해서, 수태에서 기인하는 모든 연속적 사건에 대한 무한 책임을 부모에게 부여하는 경향이 생겼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부모는 자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잘 돌볼 의무가 있다. 하지만 출산과 양육에 도입된 신개념인 ‘완전한 자율’이 지나치게 과대 평가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이것을 자율성에 대한 일종의 판타지라고 본다.
‘누칼협’이란 유행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누가 칼들고 협박했냐?’의 줄임말이다. 자율성 환상이 반영된 밈(meme)이다. 이를테면 인터넷 공간에서 아무개가 재직 중인 중소기업의 처우가 좋지 않음을 호소하면 어김없이 ‘누칼협’이 답으로 돌아온다. 누가 중소기업 취업하라고 칼로 협박이라도 했단 말인가? 자율적으로 중소기업 입사한 사람이, 군말 말고 부당함을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런 억지에 매몰된 사람들은 인간의 탄생에도 ‘누칼협’을 들이민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은, 부모에게 자신을 낳아달라고 한 적이 없다. 칼로 협박 받은 것도 아닌데 제멋대로 아기를 낳아버린 부모가 가능한 모든 (악)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인생의 많은 부분은 불확실하고 우발적이며, 깊게 파고들수록 자율과 타율의 경계도 모호하다.
어쩌다가 의도치 않게 아이가 생겨서, 고심 끝에 키우기로 결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나중에 여건이 조금만 더 나아지면 아기를 가지려고 했는데, 차일피일 미뤄지다 보니 그대로 아이 없이 살게 되는 이들도 있다. (산부인과 의사로 살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이 악물고 절대로 아기를 갖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기필코 출산을 해내려는 극단적인 사람들만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사정은 복잡하고, 저마다의 행운과 불운이 오고 간다. 결심이란 것이 있다고는 해도, 마음과 상황은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납작한 자율 환상 속에서 이러한 다양한 삶의 모습은 ‘너의 선택, 너의 책임’이라는 미명 하에 존중받지 못한다.
‘누칼협’이 흔한 세상에서 개선은 일어나지 못한다. 피해자가 칼로 협박당한 것이 아닌 이상, 누구도 타인을 도울 의무가 없다. 스스로 결정을 내린 시점부터, 누구도 불만을 표현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재생산은 개인을 고립시키는 자율 만능주의와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봐야 하는 일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본디 협력적으로 아기를 낳고 기르는 종족이기 때문이다.